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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이 내 인생이다

예술부산 ‘예인탐방’ 16. 부산국악계의 대모 부산국악협회 김정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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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예인탐방
내용

얼마 전, 방학을 앞둔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오늘은 운이 참 좋았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학교에서 국악공연을 봤다는 것이다. 안내문을 보니 부산국악협회(회장 김정애)에서 학교방문예술단 공연을 한 것이었다. 출연진의 이름만 보아도 부산 국악계에서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민요따라부르기」에서는 부산국악협회 김정애 회장이 직접 지도를 했으니 아들 말대로 운이 좋았던 게 맞다.

김정애 회장을 만났을 때 소리 한자락을 들려달라고 청했다.  

‘천지삼겨 사람나고 사람생겨 글내일제 뜻점짜 이별별짜를 어느뉘가 내였든고… 뜻점짜를 내였거던 이별별짜를 내지를 말거나…’

서슴지 않고 북을 당겨 춘향가 중의 ‘옥중가’를 불러준다. 때론 아름다운, 때론 강한 그 소리에 빨려 들어가 어느새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소리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수건 들고 울러온다고 하는 말을 실감했다. 소리꾼이 어쩌고 하면 울었다가 저쩌고 하면 웃었다가 우리네 소리 속 해학은 일상의 삶 속에서 맘껏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단 한 명의 청중인 나를 위해 불러주는 김정애 회장의 소리를 들은 나도 운이 좋았다.

귀곡성 대목에 이르러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오싹함을 느끼는데 김정애 회장은 소리를 멈춘다.

‘우리 선생님(고故오정숙)이 이 대목을 참 잘 하셨는데…. 그리 잘 하시면서도 내가 기운만 더 있어도 이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지난 12월 4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했던 여성창극 <언약>에서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이 대목을 맘껏 부르지 못했거든요. 생전에 선생님 하시던 게 눈에 선한데 기량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이제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스승을 가슴에 품고 있는 김정애 회장의 말을 들으니 스승은 제자의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살아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소리의 길, 그건 필연이었다

김정애 회장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출생신고를 하기 위해선 아버지 고향까지 가야 했는데 아버지 고향이 남해라 호적을 늦게 올리는 바람에 초등학교 입학이 늦어졌다.

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려니 어울릴 수가 없었는데 마침, 나이가 같은 친구가 있어 늘 함께 놀았다. 전라도에서 잠시 부산으로 내려와 살게 된 친구인데 그 친구가 소리를 잘 했다고 한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 친구 어머니 앞에서 친구가 늘 부르던 소리(옥로사창)를 했더니 친구 어머니는 “니가 타고난 뭔가 있는 것 같다, 소리꾼 길에 들어서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친구네가 다시 전라도로 떠날 때 소리를 배우기 위해 따라나섰다.

소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당시, 김정애 회장을 국악의 길로 접어들게 하기 위해 친구 모녀는 아무 연고 없는 부산에 잠시 내려왔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국악의 불모지인 부산에 국악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지금은 살아있는 부산 국악계의 역사가 된 김정애 회장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친구 모녀와의 만남은 그냥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고제를 배우다

순천에서 친구 어머니 밑에서 목을 다듬고 있을 때, 김성옥(본명:김창옥) 선생을 만났다. 경상도 아이라 악센트를 바꾸기 힘들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에 김성옥 선생은 소리를 해보라고 했다. 소리를 듣고 난 후 선생은 친구 어머니에게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했다.

김성옥 선생을 따라 거문도에 들어가 발음과 억양부터 시작하여 중고제 공부를 했다. 중고제는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은 다시 낮추어 부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창법이다. 서편제와 동편제의 중간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서울, 경기, 충청 지역에 많이 퍼졌던 소리다. 결혼을 하기 위해 부산으로 오기까지 김성옥 선생 밑에서 호된 공부를 하며 기량을 다졌다.

결혼 후, 부산에 살면서 국악을 향한 갈증은 멈추어지지 않아 고故 김동민 선생을 찾아갔다. 김동민 선생은 당시 부산 최초의 국악교육장을 세워 전문 국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판소리에다 무용까지 겸비한 김동민 선생에게 발림을 배웠다. 제1대 부산국악협회 지부장을 지낸 김동민 선생과의 인연이 국악협회와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부산국악협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 빠지지 않으며 김정애 회장은 부산국악계의 길을 닦아왔다.

사진설명

동초제와의 만남, 소리를 향한 열정

김성옥 선생에게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전수받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한동안 소리 공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83년쯤 영호남국악교류 때 오정숙 선생의 동초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너무 좋아 선생께 소리를 가르쳐달라 청했다. 당시, 부산국악협회 부지회장이었던 김정애 회장은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지위도, 나이도 뛰어넘은 소리를 향한 열정이 부산에서 전라도까지 오가며 동초제 공부를 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동초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예능보유자였던 판소리의 명창 동초 김연수(1907~1974년) 선생이 여러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점만 골라 창시, 자신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했다. 동편제의 강함과 서편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동초제는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설이 정확하고 너름새(동작)가 정교하며, 부침새(장단)가 다양하다. 또한 가사 전달이 확실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특징이 있다.

동초 김연수 선생은 판소리 다섯 바탕의 가사를 기록해 정리하고 여기에 장단을 넣고 현대적으로 편곡했다. 일인 다역의 판소리를 창극으로 발전시키기도 한 국악계의 거목이었다.

오정숙 선생은 김연수 선생에게 동초제를 전수받은 2대였고, 오정숙 선생께 동초제를 전수받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로 지정된 김정애 회장은 3대가 된다.

2000년, 동초제 사단법인체가 만들어질 때 김정애 회장은 [동초제 판소리보존회 부산·경남지회]를 맡아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명인, 명무, 명창을 모셔와 공연을 하며 동초제 보급에 애쓰고 있다. 지난해까지 열한 번째 마당을 했다.  

“수궁가, 적벽가까지 동초제로 배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평생 해야 할 공부를 선생님이 안 계셔서 못 하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중고제로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했는데 동초제로는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까지 전수받았다. 흥부가의 마지막 대목을 끝내고 열흘 후에 오정숙 선생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김정애 회장은 오정숙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공부를 한 제자였다.   

국악협회에서 젊음을 다 보냈다

고故 김동민 선생과의 인연으로 국악협회에 들어온 김정애 회장은 1978년부터 1998년까지 부산국악협회 부지회장을, 1999년부터 지금까지 부산국악협회 회장을 맡아 하고 있다. 전국국악경영대회 부산국악대전, 시립국악관현악단, 부산국립국악원이 생기기까지 그 시발은 항상 국악협회였다.

2000년, 국가에서 ‘한아름 교육’이 시작되기 전부터 학생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학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듣다보면 귀가 뚫리고 관객이 되기에 어릴 때부터 국악에 대한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국악과를 나오고도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제자들도 안타까웠다. 10명으로 시작한 학교 국악강사 배치가 작년에는 120명 정도로 늘었다. 대학에서 국악을 가르쳐 사회에 내보내면 끝인 줄 아냐? 는 쓴소리도 해가며 제자들의 길을 열어주려 애쓴다.

굵직굵직한 일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부산국악계에 김정애 회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은 없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우리에겐 창극이 있다

1971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부산국악인 150여 명이 동원되어 3·1절 기념 국악공연 「아아! 그날의 함성喊聲!」을 공연했다. 이 공연에서 김정애 회장은 주인공 유관순 역할을 맡아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공연을 계기로 부산 국악계에 차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조그만 곳에서 교류를 하며 잔칫집이나 찾아다녀야 하는 공연이 아니라 무대예술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한 것이다. 78년, 시민의 날 기념행사로 시작된 창극은 지난해까지 33회에 걸친 공연으로 이어졌다.

김정애 회장은 부산에 우리의 춤과 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줄 시립창극단이 생겨야 한다고 말한다. 소리도 극劇도 무용도 이제는 합쳐진 공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조그만 창극단을 만들어 동초제를 가지고 해학창극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한다. 학교방문단이든 공연장이든 어디든 마다않고 순회공연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학교방문예술단 공연을 할 때마다 교장 선생님께 어린이 민요단, 판소리단, 창극단을 만들어 학예회 때마다 발표하면 어떻겠냐고 권유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 눈망울, 거짓 없는 눈망울을 봐야 해요. 우리가 울타리가 되어 아이들이 잘 되어가는 걸 지켜주어야 하니까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아이들이 이어가 국악이 반석같이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김정애 회장의 인생은 국악을 여는 길이었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1년 1/2월호
작성일자
2012-07-1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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