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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국가지정 사적문화재 되다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 ‘사빈당’의 유래

내용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부산광역시 서구에 있는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부산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가 2018년 11월 6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6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에서 근대건축물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부산은 동래패총, 금정산성, 동삼동패총, 복천동고분군, 연산동고분군을 포함해 모두 6개의 국가지정 사적문화재를 보유 하게 되었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건립한 관사로서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목조 2층 건물이다. 이 건축물은 1920년대 남한 지역에 건립됐던 최대 규모의 도지사 관사로서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절 수도서울이 함락되고, 부산이 피란수도로 이승만 대통령이 관사에 기거하면서부터 '대통령 관저를 경무대'로 불렀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이곳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환도한 후 경남 도지사관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 후 부산시가 이 건물을 인수하였다. 1984년 6월 부산시는 이 건축물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한국전쟁 시절 피란수도 유물을 전시하는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단장해 개관했으며, 2002년 5월 부산시 기념물 53호로 지정해 관리해 왔다.

 

대통령관저 내 ‘사빈당’의 유래

 

사빈당(思邠堂)은 경상남도 도청을 창원으로 이전한 후 정화사업을 거쳐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개관한 대통령관저의 당호이다. 개관에 즈음하여 역사학자 정충환(1914~2001)은 일본 다이쇼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해방 후 부산대, 동아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던 역사학자이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정충환 선생이 지은 당호를 독립운동가 한형석(1910~1996)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항일 군가의 작곡가, 가극 연출가 등으로 활동하면서 무장 항일투쟁에 활기를 불어 넣었던 분으로 해방 후 부산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독보적인 필법을 창안한 서예가의 자필로 현판을 새겨 걸었다.

 

사빈(思邠)의 빈(邠나라이름 빈은 즉 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빈’은 지금의 중국 성서섬 순읍에 있었던 고대 은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주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문왕의 조부이신 고공단보가 다스렸던 나라이다. 고공단보는 빈을 덕과 의로써 다스렸으므로 온 나라 백성들이 그를 받들었다. 어느 날 북방의 오랑캐 훈육과 융적이 재물과 땅 백성을 요구하면서 침략하자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싸우지 않고 빈을 내주고, 기산남쪽의 주원으로 이주를 하였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이때 빈의 백성들도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왔으며, 그의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이웃나라 백성들까지 무리를 이끌고 귀의 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후대에 이르러 빈을 회복함은 물론 은나라에 이어 중국 전체의 패권을 장악한 주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사빈당’이라는 당호는 ‘고공단보와 빈‘의 고사에 빗대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에 의하여 서울을 내주고 부산에 임시수도를 마련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빼앗긴 땅을 수복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작성자
황복원/이야기 리포터
작성일자
2018-12-0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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