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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822호 기획연재

시간의 창고에서 꺼낸 봄꽃의 그늘 같은 곳

한번쯤 이곳-① 옛 송정역

내용

봄꽃, 해사하다. 연분홍, 노랑, 빨강, 보라꽃잎이 바람에 낮게 흔들린다. 막 돋아난 연초록 새순의 물결은 바다에서 시작해 산의 능선으로 물결치듯 달려간다. 푸른 바다의 물살이 토해낸 듯 투명하고 따스한 바람은 땅과 바다와 하늘, 그 사이 인간과 만물의 뺨을 슬쩍 꼬집고 지나간다. 새봄이 피워 올리는 생명의 기운은 심장에도 전해온다. 박동은 빨라지고, 발그레, 얼굴에는 홍조가 띤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녹아 포시랍게 살찌는 소리, 귓가에서 앵앵거린다. 햇살과 바람, 꽃과 나무, 흙과 바다가 통통 튀어 오르며 심장을 쿵쾅거리는, 한 번쯤 이곳, 옛 송정역을 간다. 

 

옛 송정역은 디지털시대를 거스르는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독특한 여행지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옛 송정역은 디지털시대를 거스르는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독특한 여행지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봄날 단단한 고목처럼 정갈하고 고독하게 겨울을 견딘 옛 송정역에 닿는다. 역 이름 앞에 붙은 ‘옛’이라는 관형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역의 현재를 넌지시 알려준다. 옛 송정역은 부산과 포항을 연결하던 동해남부선 철도 31개 역 중 하나였다. 동해남부선 구간 중 해안선을 따라 철로가 개설된 송정역에서 좌천역 구간은 바다 풍경을 보며 기차여행을 할 수 있어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그중 송정역은 바다 가까이 역이 있어서 바다와 철길, 바다와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간이역으로 오랫동안 사랑 받았다. 

 

철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다. 

▲철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사업은 옛 송정역의 운명을 바꿨다. 단선이던 철도 노선은 왕복 복선으로 확장됐지만, 옛 철길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기존 철로 대신 새로운 철길을 낸 것이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이 개통된 2016년 12월 30일, 옛 송정역은 문을 닫았다. 새로운 시대와 지나간 시대는 찰나에 어깨를 스치며 또다시 흘러갔다. 역이 문을 닫은 지 2년. 무엇이 그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했는지 모르게 한 시절의 더께가 봄눈처럼 애잔한 옛 송정역을 찾았다. 천지에 봄꽃이 요란하던 4월 봄날이었다.

 

옛 송정역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돌담. 

▲옛 송정역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돌담. 

 

오래 전 철길은 끊어졌고, 역사는 문을 닫았다. 한때 역사를 호령했을 역무원의 호각 소리와 기차를 타고 내리던 승객들의 발자국 소리, 갓난아기를 업고 무거운 짐을 이고 지며 기차를 타고 내렸을 젊은 여인의 가뿐 숨소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옛 기차역. 오래된 역사는 남았으나 기억은 사라지고 없는 옛 송정역은 봄 햇살 아래 폐사지의 적막으로 고요하다. 옛 송정역(부산시 해운대구 송정중앙로8번길 60)은 한국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302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역사로 쓰던 건물 1동과 창고로 사용하던 부속건물 등으로 이뤄져 있다. 역사건축면적 122.4㎡, 부지면적 4천868㎡, 철로길이는 약 300m 규모다. 옛 송정역 역사는 1940년대 전형적인 역사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도심에 위치한 몇 안 되는 근대역사로서 비교적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철제 창고 역시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띄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또한 근대기간산업과 생활문화 변천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보존가치가 크다는 이유가 인정돼 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가 된 역사는 침묵으로 말을 한다. 옛 송정역 철길을 따라 이어진 골목은 시간의 창고같은 곳이다. 역이 폐쇄된 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이곳은 지난 시절의 풍경을 희미하게 간직하고 있다. 골목 어귀에 옛 송정역과 함께 세월을 견뎌온 60년된 점포가 있다. 역사 앞에 있는 태양마트다. 그곳에는 역과 함께 한 생을 건너온 구순의 이형순(91) 할머니와 오래된 옛 가게를 차마 버리지 못해 미련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며느리 김정숙 씨가 있다. 이형순 할머니는 60여 년 전 이 자리에서 가게를 열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살기 위해 점포를 차렸다. 옛 송정역 앞에서는 물론 송정동 일원에서 처음이었다고 했다. 6년동안 보따리장수를 하며 모은 돈으로 남편이 근무하던  역 앞에 조그만 터를 사서 집을 짓고 가게를 시작했다. 당시 상호는 ‘태양상회’였다. 구순을 넘은 할머니는 가게를 연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얗게 쇤 백발, 보행기로 의존하며 걸어야 하는 노쇠한 노인에게 숫자의 의미는 크지 않다. 역과 그녀가 함께 만들어온 지난 세월만이 주름 진 얼굴에 뜨겁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60년 된 노포인 태양마트 창립자 이형순 할머니. 

▲60년 된 노포인 태양마트 창립자 이형순 할머니. 

 

구순의 노인에게 닫힌 철길과 문을 닫은 옛 송정역은 지나간 젊음의 시절이다. 역이 문을 닫기 전 며느리에게 가게를 물려주었지만, 그녀의 삶과 옛 송정역은 나뉘어질 수 없다. 지금 이곳은 그녀의 며느리 김정숙 씨가 지키고 있다.

 

역이 닫히고 이곳을 찾는 이들은 드물다. 폐역 후 시민갤러리와 프리마켓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중단된 상태다. 그나마 사람을 불러 모으던 이벤트가 끝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됐다.

 

김정숙 씨에게 장사가 잘되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헛헛하게 웃는다.

 

“안돼요. 하루에 몇 명 안와요.”

 

그런데도 가게를 폐업하지 않고 계속 문을 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

 

“오래됐잖아요. 몇 번이나 접을까 생각도 했지만, 아까워서, 아까워서 못접겠더라고요.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내가 가게를 접어버리면, 이 가게의 역사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우리같은 가게가 없어져도 누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만들었고 평생을 지켰던 곳인데. 아깝잖아요.”

 

밝고 호탕한 목소리가 저물녘의 봄햇살처럼 먼지 낀 선반을 툭 건드리며 지나간다. 그녀의 말은 꽃구경을 버리고 낡고 소외된 옛 송정역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를 말해준다.

 

옛 송정역과 그 주변은 꽃의 그늘과 같은 공간이다. 화려한 꽃의 아름다움은 그늘의 어둠이 있어 빛나고 아름다운 법. 빛과 색채에 지친 몸과 마음은 그늘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까닭일까. 옛 송정역은 잊혀졌으나 새롭게 기억되고 호명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철길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여성들이 싱그럽다. 

▲철길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여성들이 싱그럽다. 

작성자
글·김영주 / 사진·권성훈
작성일자
2018-04-1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822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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