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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3월호 통권 137호호 기획연재

임시수도기념관·비석마을·천마산 산복도로 굴곡진 역사와 피란민 삶 흔적 보듬은 길

걸어서 만나는 부산 역사 ③서구 근현대역사길

내용

서구 아미동과 부민동 일대는 부산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장소다. 일제강점기에 경상남도 청사가 자리했었고, 6·25전쟁 시기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대통령 관저가 있었던 곳이다. 아미산 중턱으로는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었고, 광복 후 귀환동포들이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지금의 비석문화마을이 형성됐다. 부산의 근현대사가 오롯한 아미동·부민동 일대의 역사길을 천천히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동아대석당박물관), 임시수도 기념거리, 임시수도기념관을 거쳐 천마산 산복도로의 돌집과 기찻집, 최민식 갤러리를 들러 비석문화마을을 돌아보는 코스다.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전망대.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전망대. 

 

임시수도 시절 역사, 오롯이 품은 ‘임시정부청사’

 

동아대 석당박물관 앞에 선다. 원래 이 건물은 경상남도 청사로 지어졌다. 1925년 일제가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건축했다. 6·25전쟁 시기에는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1950년 6·25전쟁 이후 후퇴를 거듭한 정부는 6월 27일 대전으로, 7월 16일 대구로, 8월 18일 부산으로 정부를 옮긴다. 정부청사는 경남도청(지금의 동아대 박물관)으로, 사회부·문교부 등은 부산시청(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상공부(지금의 산업자원부)는 남선전기 사옥(지금의 한전 토성동지점), 국회는 부산극장으로 청사를 옮기게 된다. 임시정부청사였던 경남도청 건물은 휴전 후에는 다시 경남도청으로 복귀했다가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본관으로 활용되는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스란히 안고 그 역할을 다했던 건물이다. 2009년 동아대박물관이 동아대 석당박물관으로 이전·개관하면서 시민들의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건물 자체가 국가등록문화재 제41호이다.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1959년 11월 1일 동아대박물관으로 처음 개관했다. 부산의 박물관 중 가장 많은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소장품의 수준과 가치가 매우 높다고 정평이 나있다. 총 3만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고고·도자·와전·불교미술·서화·민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1925년 일제가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임시정부청사로 휴전 후에는 다시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등으로 사용됐다.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1925년 일제가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임시정부청사로 휴전 후에는 다시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등으로 사용됐다.  

 

임시수도 부산 역사 기념하는 길

 

동아대 부민캠퍼스에서 임시수도기념관을 잇는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를 걷는다.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역사적 가치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길이다. 이곳에는 임시수도 시절을 기억하는 다양한 조형물과 당시 운행하던 전차 등을 볼 수가 있다. 

 

입구에는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라는 입간판이 서 있고,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에 보관 중인 전차를 전시하고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훈민정음 부조를 배경으로 공부하는 학생의 조각상, 옛 장터풍경 등 전쟁 당시의 생활상을 담아 낸 조각상 등을 조성해 놓았다. 

 

거리를 따라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 이내 임시수도기념관에 닿는다. 임시수도 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침략을 위한 경남도지사 사택으로 지어졌다가 임시정부 시절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던 기구한 운명의 장소다. 임시수도기념관은 6·25전쟁 시절 임시수도로서 국난을 극복해낸 부산의 위상과 역사성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실물 크기의 밀랍과 집무실을 그대로 재현·전시하고 있고, 전쟁 통에 사용하던 물건과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판잣집, 피란학교, 국제시장의 좌판 등을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그 외 휴전협정문과 대통령의 국군통수권 이양각서, 1951년 정부예산서 등도 전시하고 있어 임시수도 시절의 정치·행정·사회 실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길을 다시 나서 아미동 고갯길을 따른다. 마을버스가 힘겹게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이윽고 국수골목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6·25전쟁 시기에 아미동과 부민동 일대에는 원조 받은 밀가루를 재료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이 밀집해 있었다. 그 시절 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국숫집들 또한 모여 있었는데, 당시 국숫집 여러 곳이 밀집해 장사를 하던 골목이다.

 

 동아대 석당박물관에서 임시수도기념관을 잇는 길은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부산의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조성됐다. 

▲동아대 석당박물관에서 임시수도기념관을 잇는 길은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부산의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조성됐다. 

 

피란민들의 삶의 거처, 산복도로

 

본격적으로 산복도로 길을 오른다. 산복도로는 6·25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피란민들의 거처가 됐다. 살 곳을 찾아 산으로 오르게 됐고, 그곳에 임시거처로 얼기설기 천막집과 판잣집들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던 것이 산동네 사람들의 영원한 고향이 된 곳. 부산의 산복도로라 하면 주로 초량 산복도로와 영도 산복도로를 대표적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천마산을 끼고 도는 천마산 산복도로도 애환 많은 이들이 거처로 삼았던 곳이다. 천마산 산복도로를 걷는다. 이 길은 천마산 산길과 바로 이어지는 산복도로 위의 산복도로. 산복도로 아래로는 부산의 풍경이 다채롭다. 천마산 산복도로 근처에는 명물집이 몇 개 있다. ‘돌집’과 ‘기찻집’이다. ‘돌집’은 돌을 자잘하게 깨어 3층으로 올린 집인데 마을버스길 곡각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 토박이 김 씨의 집이다. 1층은 창고로, 2층은 김 씨가, 3층은 아들 가족이 생활하고 있단다. 집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큰 암반을 쪼아 방을 내고 부엌과 창고 등을 들여앉혔다. 채광이 없어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안온한 느낌의 실내가 푸근하다. 광복 후 선친이 이곳에 와서 직접 사부작사부작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데, 옛날에는 이 주위가 전부 돌산이라 망치로 큰 바윗돌을 조금씩 깨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기찻집’은 방 여러 칸을 이어붙인 집으로 기차처럼 길다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단다. 집주인이 일(一)자로 길게 루핑집(미군 부대에서 나온 루핑이라는 기름종이로 지붕을 만든 집)을 지어 살았었다고. 단칸방에 몸만 뉘이던 시절, 집주인의 배포가 부러울 정도다. 

 

현재 이곳은 ‘기찻집 예술체험장’이란 상호로 아미동 주부들이 운영하는 카페로 변신했다. ‘아미문화학습관’이 보인다. 이곳에 대한민국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의 사진전시관 ‘최민식 갤러리’가 있다. 최민식 선생은 1960∼1970년대 전쟁 후 가난으로 굴곡진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가감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다. 갤러리에는 최민식 선생의 유품과 사진작품이 전시돼 있다. 부산의 산복도로와 마을·자연풍경들, 곤고한 삶의 부산사람들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그의 일대기를 담은 동영상도 볼 수 있다.

 

 천마산 산복도로에 자리한 ‘돌집’.

▲ 천마산 산복도로에 자리한 ‘돌집’.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에 들어선 ‘비석마을’

 

감천고개 방향으로 길을 오른다. 아미로 길을 타고 고만고만한 집들이 천마산 중턱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곳은 부산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옛 16, 17, 19통 일대. 감천고개에서 산상교회 주변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1907년 일제는 일본인거류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던 공동묘지를 모두 이곳으로 옮긴다. 약 7만9천338㎡(약2만4천평) 규모. 광복 후 일본 귀환동포와 6·25전쟁으로 인한 피란민들이 아미동의 일본인 공동묘지에 임시 거처를 만들고 생활하게 된 것이 지금의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시작인 셈이다. 당시 그들은 일본인 무덤 위에 거적때기나 비닐포장, 루핑 등으로 비바람을 막으며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묘지 규모가 9.9~23㎡(3~7평) 정도 되니 집도 딱 고만했다. 공동묘지 위에 생활터전을 세워 ‘삶과 죽음’ ‘사람과 영혼’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형성됐던 것이다. 

 

마을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다녀 본다. 비석마을 일대의 어느 골목을 만나든 빼곡히 들어찬 집 주변 곳곳으로 묘지 비석과 상석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마을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둘쯤 무덤의 비석이나 상석, 무덤 울타리를 형성하던 울타리석 등이 박혀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이 비석들을 집의 주춧돌이나 댓돌 등으로 쓰기도 하고, 계단이나 석축, 담벼락 등 구조물에도 활용했다. 220여가구에 400여명이 사는 ‘비석문화마을’은 현재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의 일환으로 역사와 문화가 있는 마을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골목골목마다 밝은 원색의 벽화들을 설치해 마을이 전체적으로 밝아졌다. 마을 담벼락 2곳에는 ‘골목 갤러리’를 조성하고, 마을 중간 중간 부산 시가지가 훤히 보이는 곳에는 ‘전망대’도 설치해 놓았다. ‘전망대’에 선다. 부산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용두산과 부산타워가 보이고,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부산항이 가슴으로 닿는다. 부산의 근현대사를 걷고 난 후, 잠시나마 푸근한 풍경에 마음을 편히 내려놓는 시간인 것이다. 

 

‘아미문화학습관’에는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최민식 갤러리’가 있다.

▲ ‘아미문화학습관’에는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최민식 갤러리’가 있다.  

 

 

작성자
최원준
작성일자
2018-03-0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3월호 통권 137호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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