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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2월호 통권 136호호 기획연재

연극 연출만 35년 내공 … 토종 부산 연극인

내용

첫눈이 펑펑 왔다. 부산에선 드문 일이었다. 눈은 오전 한 시간 남짓 왔지만 기억은 오래 갔다. 저녁뉴스에 이르기까지 눈을 이야기했고 다음 날에도 그늘진 곳은 눈이 선연했다. 눈이 펑펑 온 그날 부두연극단과 액터스소극장 대표 겸 상임연출 이성규 대표를 만났다. 기억이 오래 갈 것 같은 예술인이었다. 사람의 한평생을 오전 한 시간이라고 한다면 저녁뉴스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하고 다음 날에도 선연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성규 부두연극단 대표
▲이성규 부두연극단 대표  

 

베테랑 연출가 직접 무대에 오르다

 

이성규(69) 대표 한평생은 ‘연극 연출 한평생’이다. 1984년 10월 창단한 부두연극단으로 따지면 연출만 올해로 35년째다. 대학시절 연극 동아리 연출 경력까지 보태면 40년이 훌쩍 넘는다. 그런 이 대표가 새해 벽두 연기자로 나서면서 이목을 모았다. 작년 여름 공연했던 예술가 고백 시리즈에 배우로 나설 때도 그랬지만 연기자로 나선 건 아무래도 의외였다. 만나자마자 의중을 살폈다. 

 

“이러다 배우 되는 것 아닙니까?”

 

“아이고, 배우는 뭐요.”

 

그럴 리가 있느냐며 손을 내저었다. 이목을 모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연출자가 연기자로 나선 게 첫째였고 연기자로 나선 공연이 독특한 게 둘째였다. 홍보 전단에는 공연을 ‘옴니버스 메타드라마’로 소개했다. 옴니버스는 일반적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영화나 연극을 말한다. 홍보 전단에서 짐작하듯 공연은 세 편의 독립된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공연 후 30분 정도 토크쇼와 원로와 함께하는 세미나까지 곁들여져 옴니버스 곱하기 옴니버스 연극이 됐다. 공연은 지난 1월 8일부터 19일까지 수영구 남천동 액터스소극장에서 열렸다.

 

‘너거는 늙어 봤나? 우리는 젊어 봤다!’ 옴니버스 연극 전체 제목이다. 가벼운 것 같으면서 무거운 제목이다. 이 대표 아이디어다. 세 편의 자전적 고백을 무대에 올렸고 세 명의 ‘젊어 본’ 원로가 무대를 이끌었다. 이목을 모은 이유는 셋 가운데 둘이 전문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규 대표가 특히 이목을 모았다. 다른 한 명은 극작가이긴 해도 예닐곱번쯤 무대에 섰지만 ‘천생 연출가’인 이 대표가 무대에 서는 건 생각 밖의 일,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성규 부두연극단 대표는 35년 경력의 부산을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다. 이 대표는 최근 ‘너거는 늙어 봤나? 우리는 젊어봤다’로 직접 무대에 오르면서 이목을 모았다.
▲이성규 부두연극단 대표는 35년 경력의 부산을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다. 이 대표는 최근 ‘너거는 늙어 봤나? 우리는 젊어봤다’로 직접 무대에 오르면서 이목을 모았다. 

 

부산 연극판에 쓴소리를 내뱉는 역할 자처

 

“배우는 할 짓이 아닙디다. 체력도 받쳐 줘야 하고 집중력과 감성이 살아나야 하는데 몸도 머리도 이미 굳은 상태라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이 대표가 출연한 연극은 ‘말, 말들’. 대표가 주연으로 나섰고 박호천이 특별출연했다. 박호천은 2017년 부산연극 베스트 원으로 평가받는 창작극 ‘올드 브라더 미싱’에 출연한 중견배우다. ‘말, 말들’은 부산 연극판에 애정 어린 쓴소리를 내뱉는 연극. 이 대표의 평소 말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고 구절구절 연출가 이성규의 연극정신이랄지 철학이 스며 있다. 이 대표가 굳이 연기자로 나선 것도 면전에서 직접 하면 잔소리로 들릴지 몰라 연극의 형식을 빌려 잔소리 같은 쓴소리를 들려주고자 함이었다. 

 

극에선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 대표와 부조리극은 동격이다. 이 대표를 연극으로 이끈 게 부조리극이었고 줄곧 무대에 올린 게 부조리극이었다. 부산뿐 아니라 한국에서 이성규 하면 부조리극이고 부조리극 하면 이성규라 할 정도다. 부조리극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의심이면서 질문이며 또 성찰이다. 그러면서 오늘 여기보다 나은 내일 저기로 나아가자는 바람이다. ‘부산이야기’에 ‘부산의 소극장’을 연재하면서 이미 썼지만 ‘의심과 질문’은 이성규 연극, 그러니까 이성규 부조리극의 주춧돌이자 양대 기둥이다.

 

대학시절 연극 시작 … 1984년 ‘부두연극단’ 창단

 

이 대표는 동아대 연극 동아리 출신이다. 엄혹했던 1970년대 학번이다. 시위며 위수령이며 살벌한 대학생활이 지겨웠고 방황했다. 밥도 사고 술도 산다는 말에 솔깃해 연극 동아리 극예술연구회에 들었다. 배우도 약간 했지만 사투리가 심해 연출로 옮겼다. 연극 대본을 읽었고 그러다가 부조리극의 대가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를 접했다.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된 삶을 다룬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후 실존문학 대표작으로 꼽힌다. 순간의 깨달음 같은 걸 얻었다. 연극은 현실과 따로 노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기제임을 확인했고 확신했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8년 만에 졸업하고 선박회사에서 무역 일을 했다. 성년 이후 이 대표 인생에서 유일하게 연극과 멀어진 시기였다. 무역 일을 하다 보니 술에 약한 체질인데도 양주며 맥주며 엄청 마셨다. ‘술 처먹고 사는 인생이 싫어서’ 회사를 관뒀다. 

 

“연극을 안 하면 죽을 것 같더라고요.” 

 

연극을 안 하면 죽을 것 같아 1984년 극단을 창단했다. 토종 부산극단 ‘부두연극단’이었다. 극장은 부산역과 중부경찰서 사이 영주동에 있었다. 창단공연 ‘건축사와 아씨리 황제’가 대박을 터뜨렸다. 극예술연구회 한참 후배 김하균이 출연했다.

 

이성규 대표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을 주로 연출했다.
▲이성규 대표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을 주로 연출했다(이오네스코 작, 이성규 연출의 연극 ‘왕은 죽어가다’의 한 장면). 

 

인간 삶의 근원적 모순 다루는 ‘부조리극’ 주로 연출 

 

후배 중에는 쟁쟁한 연기자가 적잖다. 김하균은 일찍 떴고 김윤석은 요즘 영화 ‘1987’로 상종가를 치고 있다. 동의대 출신 김윤석은 부두연극단 창단 멤버로 부산 연극판에서 6년을 함께 뒹굴었다. 이 대표가 1998년부터 부산연극협회장을 지낼 때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사무국장 맡은 지 여섯 달쯤 김윤석 절친인 송강호가 서울에서 뜨자 ‘초조해하던 윤석이가’ 이 회장 양해를 얻고 서울로 갔다. 그리고 떴다. 서울 연극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박지일도 그렇고 해외에서 인정받는 후배도 적잖다.

 

“이상하게도 번역극이 제 체질에 맞았어요.” 이 대표는 관객 기호에 맞춘 가벼운 창작극을 극도로 경계한다. 삶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연극은 존재가치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단 이후 창작극 대신 묵직한 번역극을 무대에 올렸다. ‘고도를 기다리며·19 and 80·에쿠우스·생일파티·로리타·진흙·죽음연습·북어대가리·물고기의 축제’ 등이었다.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천성이 그랬다. 요즘 들어선 ‘재미있는 연극을 좀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한다. ‘말, 말들’에서 박호천이 지적했듯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따뜻한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그렇긴 한데 나이가 들어 참신한 것을 찾지 못하겠단다. 그건, 번역극을 계속하겠다는 말과 같다.


 

사무엘 베케트 작, 이성규 연출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사무엘 베케트 작, 이성규 연출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제대로 된 연극 전용극장 못 만들어 아쉬워

 

‘말, 말들’은 쓴소리 대잔치다. 연극에서 그렇듯 이 대표는 평소에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후배들이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연극을 게을리 하는 것도 마뜩찮고 대도시 부산에 연극 전용극장 하나 없는 것도 마뜩찮다. 음악도 하고 연극도 하는 복합공간은 있지 않으냐고 끼어들자 대뜸 퉁을 놓는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복합공간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란 질책이다. 지나치게 큰 극장도 말고 한 300석 정도, 천장 높고 교통 편한 자리에 전용극장이 들어서면 부산 연극 금방 일어설 텐데 그렇게 못해 후배에게 미안하고 부산시민에게 미안하다.

 

“눈치 본다고 사실은 기 다 죽었습니다.” 극단을 창단하면서 빚 인생이 시작됐다. 못 버는 건 그렇다 치고 빚은 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에쿠우스’가 대박 터뜨리긴 했어도 빚 갚는 정도였다. 집도 한 채 팔아먹었다. 부산대 극예술연구회 출신 고교 교사 아내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내는 올해 2월 퇴직한다. 아내에겐 기죽고 살지만 연극판 기는 아직 펄펄 살아 있다. 어떤 연극인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의 대답이 그걸 입증한다. 


작성자
동길산
작성일자
2018-02-0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2월호 통권 136호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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