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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27호 기획연재

광안대교 다릿발, 바위 속 1.5m에 심었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2화·원시인이 낳은 최첨단 다리, 광안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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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숨은 얘기
내용

'지진 강국' 일본이 지진 한방에 초토화된 적이 있었다. 1995년 1월 발생한 고베 대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6천400여명이 목숨을 잃고, 20만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고베 항만시설 대부분이 부서지거나 파묻혔다. 피해액은 우리 돈으로 약 150조원. 일본 간사이 지방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이 지진의 강도는 7.2였다.

부산 앞바다에 진도 7을 넘는 강진이 발생한다면 부산의 세계적 명물, 광안대교는 흔적도 없이 폭삭 주저앉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광안대교는 끄떡없다. 광안대교는 진도 9를 견딘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통상 진도를 10까지 분류하지만 10은 상징적인 것이고, 제일 큰 지진을 이야기할 때 9를 기준으로 삼는 점을 고려하면 광안대교의 내진설계는 최고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이다.

광안대교는 국내 처음으로 진도 9에 내진설계를 맞춘 교량이다. 광안대교 다릿발은 해저 밑 바위 속 1.5m 깊이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서있다.

당시 광안대교 건설사업소장을 맡았던 조창국 씨는 일본 간사이 지방을 초토화시킨 고베 대지진이 광안리 앞바다를 뒤흔든다 해도 광안대교는 끄떡없다고 잘라 말한다. "대한민국 교량 중 내진설계를 진도 9에 맞춘 것은 광안대교가 처음입니다. 광안대교 앞에 최초니 처음이니 하는 수식어를 자꾸 붙이자니 민망한 생각도 듭니다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광안대교 설계 당시인 20여년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지진이 없는 곳으로 알려져 대부분 내진설계를 하지 않았다.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진이 잦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바다에 놓는 다리라 더 취약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몇 년 사용하고 말 다리가 아니라 '100년 설계 수명에, 200년 기대 수명'을 계획하고 있던 터라 지진 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장차 200년 동안 어떤 지진이 닥칠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내진설계를 무시하던 때라 그냥 넘어가도 트집 잡을 사람은 없었다. 광안대교 이전의 다리나 아파트들은 지진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꼼꼼하고 치밀했다. 직원들과 자료를 찾아 지진을 공부했다. "고려사,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에 지진기록이 나옵니다. 1905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인천에 지진계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 약 30년 간격으로 구조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진도 5 이상의 지진이 일어났더라고요. 1978년 이후에는 진도 4 이상의 지진이 매년 발생, 빈도수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처음 설계 때 진도 8을 견디도록 기준을 세웠다. 당시로선 상상을 초월하는 내진설계였다. 8을 넘어 진도 9를 견디도록 설계를 강화한 계기는 고베 대지진이었다. "고베가 아수라장이 된 것이 1995년 1월입니다. 광안대교 착공을 한달 앞둔 시점이었어요. 아, 이거 안되겠다. 광안대교 내진설계를 더 강화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서울에 허진 박사라고 지진에 유명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을 찾아가 자문을 받고, 직원들과 보고차트를 만들어 당시 문정수 시장님을 찾았습니다."

"시장님, 큰 지진이 일어나면 대책이 없습니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보강을 할 방법도 없습니다. 광안대교는 6천억원이 넘는, 부산을 상징할 엄청난 다립니다. 100억만 더 주시면 진도 9에 맞추겠습니다." 시장, 부시장, 실·국장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차트를 넘겨가며 내진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 시장께선 빠른 결단을 내려주었다. 언론이 고베 참사소식을 연일 보도하고 있었고, 부실시공으로 서울 성수대교 붕괴참사가 일어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던 때라 사회 분위기와도 맞아떨어졌다.

진도 8에 맞춘 당초 계획은 광안대교를 떠받치는 교각을 '중질토'라는 단단한 흙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중질토가 단단하다지만 역시 흙은 흙이지 않습니까? 진도 9에 견디도록 내진설계를 강화하면서 중질토에서 바다 밑 암반이 나올 때까지 10m 이상을 더 파내려갔습니다."

암반을 만나고는 다시 바위 속으로 1.5m 깊이까지 굴착했다. 광안대교 교각은 갯벌이나 모래층, 흙이 아닌 연암(軟巖)이라는 바위 속에 세워졌다. 광안대교 다릿발은 해저 밑 바위 속 1.5m 깊이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서있는 것이다.

광안대교내진설계를 강화하고 공사를 시작한지 4개월쯤 지난 1995년 6월 서울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붕괴원인은 총체적인 부실시공. 성수대교에 삼풍백화점까지 무너지자 우리 사회엔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몰아쳤다. 부산시는 삼풍백화점 사고 직후 광안대교 건설사업소를 건설안전관리본부로 승격했다. 기구승격과 함께 조직도 크게 보강했다. 광안대교 건설사업소장에서 건설안전관리본부장으로 승진한 조창국 씨는 "그때부터 광안대교는 물론이고, 백화점이나 영화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형건물의 안전점검 업무를 모두 맡아 시작하게 되었다"며 "결과적으로 고베 대지진이 광안대교를 더 탄탄하게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조 본부장은 "원래 공무원 사회가 보수적이라 남이 하지 않는 일은 책임이 두려워 남보다 앞서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후배 공무원, 특히 기술직 공무원들의 유연하고, 발전적인 생각의 전환을 당부했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2-05-3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27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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