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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26호 기획연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예술부산 ‘예인탐방’ ⑧ 일찍 두각을 나타낸 대시인, 故 이형기 시인

내용

첫 만남…

이형기 시인을 문예지를 통해서만 알고 있다가 내가 직접 만난 것은 1974년이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이형기 시인에게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박응석 시인과 함께 국제신문사로 찾아갔다. 나와 박응석 시인과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린 박태문 시인은 내가 결혼할 사람의 집으로 함을 지고 첫 새벽길을 같이 걸어갔던 막역한 친구지간이다. 이형기 시인은 당시 국제신문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형기 시인은 문단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나의 대선배였다. 내가 첫 대면한 이형기 시인은 문단의 대선배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지적이며 지적인 외모에 날카로움이 번득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찾아온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형기 시인은 웃는 얼굴로 나의 청을 쾌히 승낙해 주었다. 나와 이형기 시인의 첫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1975년 1월 9일 나는 이형기 시인의 주례로 차숙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린 몇 개월 뒤 나는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부산MBC에 PD로 근무하던 친구 유판수와 이수익(시인)이 내가 결혼을 했으니까 놈팽이 생활은 이제 그만 접고 처와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부산시 택시사업조합에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1975년 6월의 일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친구들인가. 나는 평생 처음 가져보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이형기 시인의 인간미

이럭저럭 세월은 흘러 1978년이 되었다. 어느날 나는 광복동 입구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보리수다방에서 이형기 시인을 만났다. 이형기 시인은 나를 부르더니 대뜸 국제신문 기자공채 시험을 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무척 반가우면서도 나이가 넘어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38세였다. 기자시험 자격연령은 29세인가 30세였다. 이형기 시인은 나의 말을 듣더니 그것은 자기가 모두 조정해 놓을테니 걱정 말고 시험공부나 부지런히 하라는 당부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형기 시인은 나를 국제신문 기자로 넣기 위해 이미 각본을 짜놓았던 것이다. 이형기 시인은 나를 기자로 만들기 위해 사규를 고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기자시험 자격연령을 40세로 높였고, 둘째는 수습기간을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시켰으며, 셋째는 수습기간의 봉급은 60%, 80%, 100%로 되어 있는 사규를 수습기간 중에도 정규기자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바꿔 놓았다.

수습기자 기간 단축은 우리 기가 입사한 다음 해부터 전국 신문사로 확대되어 수습기간이 3개월로 단축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채시험에는 인파가 몰리기 마련이었다. 내가 응시한 시험에는 3명을 뽑았는데 거의 600여 명이 시험에 응했다. 나는 1978년 3월 1일부로 국제신문 편집국 교열부 기자로 발령을 받고 본격적인 기자생활로 접어들었다.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임과 동시에 이형기 시인의 인간미가 듬뿍 풍겨 나오는 일화이기 때문이다. 기자공채시험에 합격해 입사를 하면 신원진술서 7통을 회사에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 총무국에서는 신원조회용 신원진술서를 청와대, 집권당, 중앙정보부, 국방부, 보안대, 검찰청, 경찰청으로 각각 1통씩 보냈다. 회사는 두세 달 만에 내려오는 회신 내용 결과를 보고 채용 여부를 최종 결정했다. 이것은 모두 수습기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신원조회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감옥소를 들락거리더니 6·25가 일어나기 1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행방불명이고, 나의 어머니 역시 사상문제로 부산감옥소에서 옥고까지 치른 전력이 대단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연좌제가 폐지된 초기였지만 그래도 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의 이 불안감을 말끔하게 해소해 준 사람이 이형기 시인이었다. 이형기 시인은 나의 고충을 듣더니 편집국장인 자기가 신원보증을 해 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했고 사실 이형기 시인은 그렇게 했다. 이형기 시인이 아니면 과연 누가 이런 위험한 일을 스스로 해 주었겠는가. 나는 이형기 시인의 인간미 넘치는 배려로 무사히 수습기간을 마치고 기자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그로부터 아무 탈 없이 정년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형기 시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형기 시인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고 내가 결코 잊어서도 안될 은인이다.

예지력이 뛰어난 시인

이형기 시인은 이와 같이 시적인 날카로움 뒤에 숨어있는 따뜻한 인간미가 돋보이는 사람이다. 시인은 따스한 감성을 가지고 있어야 인간적이며 영원성을 지닌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다. 나는 이형기 시인이 이러한 품성을 가진 천재적이며 예지력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형기 시인은 『꿈꾸는 한발』과 『풍선심장』이라는 시집을 통해 한국의 정치풍토와 사회상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로 진단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예리하고 비정할 만큼 냉혹한 이미지로 표상화하고 있다. 시인의 예지력은 현실을 올바로 분석·비판하고 극명한 표현으로 작품화해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형기 시인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시대의 경이로운 시인이며 위대한 시인이다.

‘낙화’의 시인 이형기

‘허무의 시인’ ‘전통시학에 뿌리를 둔 서정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형기 시인은 1933년 경남 진주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2남 2녀 중 맏이였다. 이형기 시인의 자술연보에 의하면 원래 태어난 곳은 경남 사천군 곤양면이었는데 농사일이 지긋지긋했던 시인의 아버지가 시인을 낳은 3년 뒤에 농사일을 시인의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진주로 살림집은 물론 본적까지 옮겼기 때문에 시인은 진주 태생이라 일컫는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울러 진주농고 진학 사유도 덧붙였다. 가난을 면하려면 당시 맏이는 취직 잘되는 학교로 가야 하는데 진주농고를 졸업하면 군청 서기로 쉽게 취직이 된다고 아버지가 선택해서 갔다고 실토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는 뒷전이고 문학에만 열을 올렸다.

이형기 시인은 진주농고 재학시절부터 시적 재능을 드날리기 시작했다. 1948년 제1회 개천예술제 한글시백일장에서는 16세 어린 나이로 장원을 차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49년에는 17살 나이로 문예지 『문예』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최연소 등단기록은 아직도 깨뜨리는 문인이 나타나지 않아 이형기 시인의 천재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형기 시인의 시력을 살펴보면 초기와 중기, 후기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초기 시는 존재의 탐구와 언어의 심연을 모색하는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중기 시는 비수와 같이 번뜩이는 날카로운 감성을 지닌 주지주의 시가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후기 시는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정치풍토와 사회상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문명비평적인 시가 시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대시인 이형기는 다작 시인이 아니었다. 열여섯 살부터 문재를 드날렸으면서도 언어를 아끼며 밀도 높고 함축성 있는 시를 썼기 때문에 1963년도에 펴낸 시집 『적막강산』으로부터 생전에 마지막 시집이 된 1998년도판 『절벽』까지 8권밖에 펴내지 않았다. 평론집과 산문집도 9권을 독자들에게 선보였을 뿐이다.

이형기 시인이 세상을 뜨자 지인들과 후배 시인들이 뜻을 모아 2008년 7월 12일부터 13일, 이틀간 이형기 시인의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제1회 이형기문학제>를 개최했다. 이형기문학세미나, 이형기 시인을 주제로 한 시극공연, 청소년시낭송대회, 대금산조, 허튼춤사위, 음유시인의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쳐 이형기 시인을 추모했다.

이형기 시인은 이미 이승을 하직했지만 살아있는 고향 사람들과 문인들은 그를 오늘에 되살려 그의 시정신을 더더욱 감미롭고 빛나게 재평가하고 재조명하는데 심혈을 쏟았던 것이다.

끝으로 나는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이형기 시인의 시 두 편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나는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 가뭄이 든 랑겔한스섬 / 거북 한마리 엉금엉금 기는 / 갈라진 등판의 소금꽃 // 속을 리 없도다 /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 허옇게 번지는 마른 버짐이니라 // 오 박토여 /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농사와 / 쭉쭉 골이 패인 / 내 손톱밑의 반달의 고사여 // 가면 가는 그만큼 /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 한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섬 // 꿈 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 물도 불도 그 아래선 / 한줌 먼지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 랑겔한스섬의 가문날의 꿈이니라
-‘랑겔한스섬의 가문날의 꿈’전문

위의 시는 문명비평적인 모던한 시이지만 드라이하지 않고 감성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탁월한 작품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낙화’ 전문

이형기 시인은 위의 뛰어난 서정시를 남기고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10여 년간 신병으로 모진 고생을 하다 2005년 2월 2일 73세로 우리 곁을 훌훌 떠나버리고 말았다.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시인이었으면서도 인간미가 넘쳤던 이형기 시인을 우리는 생전에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형기 시인의 대표작 ‘낙화’의 시비는 경남 진주시 신안동 공원에 세워져 있다.

글 임수생 / 시인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1/2월호
작성일자
2012-05-2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26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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