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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연재

같은 듯 다른 매력으로 사람들 발길 잡는 두 시장

내용

폭염이란 말이 어느새 익숙해진 2018년의 여름, 길남 씨는 또 어느 시장을 돌아봐야 하나 하고 머리를 긁어대다 결국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을 떠올린다. 부산 사람이라면 정말 익숙한 시장, 같은 이름의 영화까지 대박나 전국구로 이름 날리는 ‘국제시장’. 그에 질세라 ‘깡통시장’이란 극강의 별명을 함께 달고 여전히 사람들로 득실대는 ‘부평깡통시장’. 

 

사실 길남 씨는 이 두 시장의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 마음먹었었다. 그 규모와 역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 시장들을 섣불리 건드렸다가 욕이나 들어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했건 저러했건 이번 ‘전통시장 탐방기’는 국제시장과 부평시장으로 결정 나 버렸다. 

 

그 이유인즉슨…. 며칠 전 그는 포항에서 내려온 소설가 A를 대접하기 위해 부평시장 아래 양곱창 골목에 들른 적이 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폭염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넘쳐났다. 보수동 영락교회 쪽에서 내려왔던 터라 일행은 부평시장의 명물로 자리 잡은 야시장을 지나가야 했다. 

 

쪽갈비, 꼬치, 치킨, 닭강정, 오코노미야키, 문어통치즈, 삼겹말이…. 대체 어디서 나온 메뉴들인지 각각의 포장마차 매장엔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베트남, 태국, 홍콩 등등 온갖 나라의 음식들이 뒤섞여 우측통행 좌측통행 하다 보니 어느새 야시장을 벗어났고 일행은 ‘탈출’이란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은 부산의 숱한 역사와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사진은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된 국제시장 꽃분이네).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은 부산의 숱한 역사와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사진은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된 국제시장 꽃분이네).

 

양주가 컴퓨터로 바뀌던 추억의 ‘부평깡통시장’


“여기가 원래 그냥 시장이란 말이죠?”

 

소설가 A의 질문에 길남 씨는 좌우측 시장 골목을 가리키며 말한다. 

 

“낮에는 흑교로, 그러니까 옛날 피란시절에 까만 다리가 있다고 해서 저쪽 차 다니는 큰 대로가 흑교로예요. 이 부근하고 보수동 일대 사람들이 장을 보는 전통시장이죠. 규모야 보시다시피 말할 것 있나요?”

 

“그럼 국제시장은 어딘데요?”

 

길남 씨는 잠시 말문이 막힌다. 그래, 어디서부터 국제시장이고 어디서부터가 부평깡통시장이냐? 하지만 그는 곧 개념을 잡고 설명한다.

 

“남포동하고 용두산공원 쪽으로 가면 저쪽 길 건너로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와요. 책방골목 입구 건너에 상점들이 양쪽으로 쫙 깔린 큰 대로(중구로)가 있는데, 보통 그쪽에서 용두산공원 쪽을 국제시장, 이쪽 건너로 좀 걸으면 부평깡통시장이라고 하죠.”

소설가 A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깡통시장이 미군물품이나 외국상품들이 많다고 해서 그런다고 했는데 국제시장도 처음에 매한가지 아니었어요?”

 

길남 씨는 또 한 번 멈칫하다 문득 떠오르는 옛 추억에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저도 어릴 땐 구분이 안 갔는데 어느새 구분이 되긴 해요.”

 

국제시장은 구제 옷, 장판, 문구 등 유행에 민감한 상품들이 많다.

국제시장은 구제 옷, 장판, 문구 등 유행에 민감한 상품들이 많다.

▲국제시장은 구제 옷, 장판, 문구 등 유행에 민감한 상품들이 많다.


외국물품 취급하는 ‘부평깡통시장’·전문 품목 갖춘 ‘국제시장’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컴퓨터란 놈을 가져보았다. 선원이셨던 아버지는 아들의 컴퓨터를 장만하기 위해 외국에서 들여온 팔뚝보다 더 큰 양주 네 병을 깡통시장으로 가져가 파셨다. 철없던 어린놈의 길남 씨는 그때 낑낑대며 대형 양주병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가게 몇 곳에서 익숙한 흥정을 하고는 가게 주인과 악수를 나누었다. 길남 씨는 덕분에 깡통시장의 위치와 그 막강한 위력(양주 4병이 컴퓨터로 바뀌는 걸 눈으로 확인했으니까)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 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줄고 문을 닫는 가게가 많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평깡통시장의 명성은 죽지 않았다. 요즘도 사람들은 백화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외국상품을 깡통시장에서 찾곤 한다. 부평깡통시장의 홈페이지는 이런 자부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1910년 개설, 점포 수 1천 500여 개, 부평깡통시장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시장으로 사거리시장이란 이름으로 시작해 6·25전쟁 이후에는 외국 구호물품과 외국물자들을 사고파는 특이한 장소이기도 하였으며, 외국물품을 판다 하여 깡통시장으로 이름 붙여졌음. 부평깡통시장은 수입 깡통 제품 판매 매장이 많다. 대형마트나 백화점보다도 더 많은 제품들이 있음.’

 

그렇다. 사실 부평깡통시장이나 국제시장이나 큰 구분 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두 시장의 거리가 가깝고 모습들이 비슷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두 시장은 각각의 특색에 맞춰 더 특화돼 왔다. 주변의 먹거리와 상품만 해도 주변 환경에 맞춰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국제시장은 말 그대로 국제적이며 전문적 성격을 띤다. 외항부두와 닿아 있고 국제여객터미널이 가까이 있어 구제 옷 등 패션과 전자제품, 안경, 옷감, 장판, 문구 등 유행에 민감한 상품들이 시즌에 맞춰 재배열되는 최신 유행의 집산지이다. 하지만 깡통시장은 양주, 수입약품, 담배, 가전제품, 수입 과일 등 유행을 타기보다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수입상품들의 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먹거리도 국제시장 쪽이 비빔당면, 팥빙수, 유부우동, 종각집 우동, 어묵, 오징어무침, 씨앗호떡, 순두부 등 분식류를 중심으로 젊은 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돼지머리국밥, 어묵도매점, 통닭, 양곱창, 갈비, 족발 등등 선 굵고 진한 음식들은 부평깡통시장 쪽이 강세를 띤다. 

 

국제시장 대표 먹거리인 부산어묵과 비빔당면.

▲국제시장 대표 먹거리인 부산어묵과 비빔당면.

 

도떼기시장에서 자유시장, 또 국제시장으로 


길남 씨는 이제 길 건너 국제시장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예전 미문화원 건물인 부산 중구 대청로의 근대역사관 부근은 조선시대의 초량왜관과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거류지를 거치며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인들이 거주했었던 지역이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아예 뿌리를 내렸거나 이곳이 고향인 일본인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들의 고향은 일본이 아니라 도리어 이곳이었을 터….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세세한 사정을 봐주지 않고 동시대 각각의 인생을 덮쳤을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그들을 실어줄 배는 모자랐다. 그들이 배에 싣지 못한 짐들은 남겨져야 했고 헐값에 팔려나가야 했다. 일본인들이 떠나간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짐을 풀어 값을 매겨 사고팔았다. 그리고 일본과 세계 각지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자신들의 짐을 이곳에 풀었다. 이렇게 현 대청로 부근은 서서히 시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며 ‘도떼기시장’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너무 소란스럽거나 떼를 지어 웅성거리는 상황을 일러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 ‘여가 도떼기시장이가!’

 

하지만 도떼기시장은 입말로는 쫙쫙 달라붙지만 정식 명칭으로 쓰기엔 좀 그랬다.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1948년 시장 건물이 들어섰고 여기에 ‘자유시장’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미군이 들어오고 6·25전쟁이 일어나며 부산으로 전국의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피란민 수용소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은 지금의 감천과 아미동, 수정동 등지에 판자촌을 형성했다. 늘어난 인구에다 전쟁구호물자와 미군 부대에서 빠져나온 갖가지 물건들이 시장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제 시장은 말 그대로 국제적으로 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제시장’의 탄생이다. 국제시장의 홈페이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해외양품, 미군부대 군수물자, 수입 밀수품, 전자제품 등 태어난 순간부터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의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던 곳’.

 

과연 국제시장을 대표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5번의 화재에도 되살아난 ‘국제시장’


순두부집 ‘돌고래’가 있는 구제골목에는 지금도 옷 보따리를 풀어놓고 보세 옷 한 벌에 1천 원, 2천 원 하는 가게가 널려있고, 그릇·옷감·장판·학용품·전자제품·안경 등등 수많은 상품들이 도매가격으로 거래되는 곳이 바로 국제시장인 것이다. 

 

현재 국제시장은 1공구에서 6공구, 12개동 24개 공간으로 구분해 현대화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이다. 국제시장도 많은 위기들을 겪어왔다. 70여 년의 역사 속에서 국제시장은 크고 작은 화재가 5번이나 있었다. 특히 가장 최근인 1994년의 화재는 시장의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지금도 길남 씨는 그때의 기억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다. 마치 도떼기시장 시절로 돌아간 듯, 불에 타지 않은 물건들을 거리에 내어놓은 상인들이 쭉 늘어서 있던 모습을. 그것은 국제시장 상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뿐인가? 1994년의 또 하나의 기억은 올해와 맞먹는 폭염이었다. 이런 폭염과 더불어 터졌던 ‘쌀개방 반대 시위’는 뜨거운 열기로 불이 붙어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부터 미문화원까지 시위대의 행렬이 이어졌었다. 비록 비폭력시위였지만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시위대가 흩어졌을 때의 한 장면을 길남 씨는 절대 잊지 못한다. 셔터가 내려져 있던 국제시장의 가게 문들이 늦은 시간임에도 동시에 열리며 학생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때 상인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겹기까지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숱한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산의 국제시장’이란 문구를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에서 이어지는 보수동 책방골목.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에서 이어지는 보수동 책방골목. 

 

오래된 책·종이냄새 가득한 ‘보수동 책방골목’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이 두 시장도 새로운 살아남기를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영업을 하시는 한 상인의 말에 따르면 영화 ‘국제시장’의 성공과 원화 환율 하락으로 인한 중국, 일본 관광객의 급증으로 두 시장은 제법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의 호황은 건물세 인상으로 다가왔고 갖가지 요인의 불경기는 건물세를 이기지 못한 많은 가게들을 폐업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시의 많은 대책들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길남 씨는 국제시장 실비거리를 어슬렁대다 마지막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러보기로 한다. 몇 년간 계속해서 위기설이 감돌던 책 골목은 예전만큼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나 길남 씨는 슬쩍 풍겨오는 이곳의 종이냄새를 맡을 때면 부산 사람임에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황홀하기까지 하다.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 어느 곳에서 이런 인문학적이면서도 삶의 냄새가 풀풀 풍겨나는 곳이 있단 말인가? 사라져야 할 것들은 빨리 사라져야 하겠지만, 남겨져야 할 것들은 제발 부탁이지만! 꼭 남겨져야 할 것이다. 길남 씨는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번 시장 탐방도 아주 보람찼구만. 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 책방골목…. 역시나 무림강호라 불릴만 해. 그대들이여 영원하라!’

 

책방골목을 한참 헤매던 길남 씨는 아쉽게도 ‘국민서관 세계동화전집 47권 홍당무’를 찾지 못하고 더위에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를 위로한다. 창밖의 뜨거운 열기에도 활기차기만 한 시장들이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배길남 기사 입력 2018-08-31 부산이야기 9월호 통권 143호
자료출처 : 함께 나누고 싶은 '부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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