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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7월호 통권 141호호 기획연재

400년 역사 … 도시·사람·물자 이어주는 시장

길남 씨의 전통시장 탐방기 - 구포시장

내용

길남 씨는 시장탐방기를 쓰면서 몇 번이나 벼르다 남겨둔 구포시장으로 향한다. 오늘 그는 특이하게도 시장을 먼저 들르지 않고 양산 방면을 둘러보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선을 택했다. 그 이유는 왜일까? 

 

길남 씨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 전의 7월, 구포역에서 기차를 내리고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이끌려 고물 승합차에 덜컥 잡혀 올라가 어디론가 끌려간 적이 있다. 걱정할 건 없다. 불법적인 행위가 아닌 합법적인 신병 인수인계 과정이었으니까. 당시 그를 데리러 온 고참인지 직원인지 모르는 인물이 구포시장을 지나치며 이런 말을 했었다. 

 

“아따, 이 여름에 장날이라고 사람들 좀 봐라. 야야, 저 사람 양산경찰서 옆에 식당 아지매 아이가? 물건 떼러 욜로 왔는가베. 야, 차 빼라. 막히갖고 일로 가면 안 되겠다!” 

 

길남 씨는 그때서야 본인이 자대배치 받을 곳이 양산이란 걸 어렴풋이 알아챘다. 대학생의 때가 채 벗겨지지 않은 신병은 장날 짐짝처럼 여기저기로 옮겨지면서도 차창 밖으로 드러난 구포시장의 모습을 흘깃 흘깃 바라보며 감격했었다. 

‘아아,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 부산인가?’

 

조선 시대에 형성돼 400년의 역사를 가진 ‘구포시장’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도시와 사람, 물자를 이어주는 시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형성돼 400년의 역사를 가진 ‘구포시장’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도시와 사람, 물자를 이어주는 시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구포 장날 더욱 커지는 ‘구포시장’


그 여름날의 구포시장 장날의 인파는 길남 씨의 머릿속에 강렬한 기억이 돼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 그는 사라진 양산의 부대 근처를 살펴보고는 다시 내려와 구포시장으로 가는 동선을 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추억 찾기는 상전벽해를 이룬 양산신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만다.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뀐 풍경에 허둥대던 그는 서둘러 부산으로 돌아와 다시 구포시장 입구에 섰다. 장날이면 좋겠지만(사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피곤하니 장날이 아닌 게 더 좋았다고 고백한다) 아니더라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러면 구포시장은 시골의 5일장과 같은 그런 시장이란 말인가? 분명 아닌 것은 확실하다.  

 

전국 전통시장 최초의 여성전용 화장실(어떤 매체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이 있다는 희한한 정보 외에도 구포시장의 명성은 화려하다. 그 유명한 구포국수부터 시작해 이름만 대면 안다던 가축시장(일명 개시장으로 불린 흔적들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구포시장은 2011년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당시 구포시장은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돼 ‘정(情)이 있는 구포시장’이란 이름으로 750여 개의 점포를 가진 상설시장으로 발돋움한다. 세 번에 걸쳐 정비된 아케이드 천장이 있고 시장 골목마다 이어지는 수십 개의 입구는 각자 특화된 상품 거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구포시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렇게 큰 시장이 매월 3일, 8일이 들어가는 날 더욱 크게 업그레이드된다는 점이다. 조선 중기 형성됐다는 구포장은 3, 8일 장으로 읍내장(2, 7일), 좌수영장(5, 10일), 부산장(4, 9일), 독지장(1, 6일)과 함께 5일장 체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장은 오직 하나 구포장이 유일하다. 

 

장날이 되면 김해·양산·원동·창원 저 멀리 경북에서까지 밀려온 장꾼들로 점포는 1천500개로 늘어나고 사람은 적게는 3만, 많게는 5만 명이 넘게 모인다고 하니 전국 최고의 시장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하다. 

 

구포시장의 명물 ‘구포국수’는 6·25 전쟁 중 굶주렸던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던 음식이다. 

▲구포시장의 명물 ‘구포국수’는 6·25 전쟁 중 굶주렸던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던 음식이다.

 

 

미로 같은 시장길 숨은 보물들


길남 씨는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다 가축시장의 입구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빨간 조명의 정육점 냉장고를 발견하지만 늠름하게 다른 입구 쪽으로 서둘러 걸어간다. 그는 하나의 문화를 혐오의 눈으로 미리 견주어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이 또한 전통 있는 한 시장의 풍경일 따름이다. 주변에는 토종닭보다 더 큰 닭들이 꼬끼오 하고 소리치는 가게들도 많다. 

 

주차 때문에 강제로 가축시장을 탐방하고는 아케이드 입구 ‘행복한 상상의 거리’로 들어선다. 의류·신발이 있는 삼거리길을 지나 완도댁 김치가게에서 잠시 멈칫하던 길남 씨는 곧장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선다. 이유는 하나, 배가 출출하기 때문이다. 겹겹이 미로와 같은 구포시장의 길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상품이 풍성해지는 신비한 길이다. 

 

야채거리를 지난 그는 수산물거리를 걷는다. 막썰어회와 민물회, 신선한 해물들이 그득하다. 대낮에 낮술을 고민해야 하는 마당이다. 그 찰나에 먹자길이 짠하고 나타난다. 떡집, 죽집, 족발집, 튀김집, 분식집, 순대집, 돼지국밥집, 유명한 구포장국밥, 구포국수…. 구포시장의 현란한 공격에 황홀경에 빠진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간단한 요기를 하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아카이브 지붕 덕에 불이 켜진 간판들은 야시장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구포시장에는 아직도 ‘두꺼비 신발 백화점’ ‘다모아 신발나라’ 등 대형 신발가게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다.  

▲구포시장에는 아직도 ‘두꺼비 신발 백화점’ ‘다모아 신발나라’ 등 대형 신발가게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공간 … 구포장터 3·1운동 거세게 일어나 


길남 씨는 이 음식들 중 구포장국밥에 주목한다. 구포장 400년의 역사 속에서 이곳 구포에는 객주가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교통의 요지였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쌀과 여러 물자가 일본으로 공수되는 수탈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 일대 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은 컸을 것이다.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그 저항이 매우 거셌다고 전해지며, 매년 3월에 구포장터 3·1운동 재현 행사가 시행될 정도로 유명하다. 

 

또 이곳의 객주와 지주 등 70여 명이 1908년에 자본금 2만5천 원으로 세웠다는 ‘구포주식회사’는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이후 1912년 6월에는 민족 자본으로 세운 구포은행을 설립했다고 하니 이곳의 저항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돼지사골과 고기를 푹 고아 그 국물에 밥을 말아낸 구포장국밥은 이런 사연들의 주인공들을 든든하게 뒷받침 해준 음식인 것이다. 

 

길남 씨는 장국밥을 보는 것만 해도 갑자기 배가 부르다. 시장을 다 돌아보고 맛있게 먹어주리라 생각을 고쳐먹고 5번가 패션거리를 둘러본다. 시장골목은 어디로든 연결된다. 패션거리의 옷집들을 둘러보다 보니 또 농산물거리가 펼쳐지고 닭, 소, 돼지 등의 식육점거리가 형성된다. 

 

“아, 이렇게 큰 시장 신발가게는 또 간만이네….”

 

두꺼비 신발 백화점, 다모아 신발나라 등 가게 이름까지 정겨운 신발가게는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이 신발 저 신발 신어보던 추억을 금방 불러일으킨다. 같이 갔던 동행이 쿡쿡 찔러 쳐다보니 규모 있는 전통시장에 꼭 하나씩 있는 ‘성인전용무도장’도 눈에 들어온다.   

 

싱긋 웃는 사이 길남 씨는 도시철도 덕천역 부근의 바깥 상가로 빠져나온다. 도로가를 걷다 유명한 약재거리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다시 시장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주차장 공터에 ‘구포국수’ 파는 곳이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나름 포스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구포시장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줬던 구포장국밥 골목 풍경. 

▲구포시장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줬던 구포장국밥 골목 풍경.

 

전쟁 통 굶주림 채워주던 ‘구포국수’


구포국수는 전쟁 통에 부산을 거쳐 갔던 사람들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 구포국수 특유의 쫄깃하고 짭짤한 면발은 구포 곁을 흐르는 낙동강 바람과 약간 먼 듯하지만 함께 섞여 있는 해풍의 소금기가 더해져 만들어졌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구포국수는 간단한 요기와 함께 사람들의 힘을 북돋워주는 음식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한 공장이 ‘구포국수’를 상표등록하려다 주변 공장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요즘 부산의 슈퍼에 있는 거의 모든 국수의 상품명이 구포국수일 정도로 ‘구포국수’의 브랜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길남 씨는 종묘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으로 접어들며 유명한 약재거리를 걸어본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한산하지만 장날에는 훨씬 붐빈다고 한 상점의 사장님이 귀띔한다. 한약재의 냄새가 가득 퍼져있는 약재거리는 걷는 것만 해도 건강한 느낌을 불러온다. 

 

“허, 근대화 슈퍼, 정말 오랜만이잖아.”

 

추억의 ‘근대화 슈퍼’가 아직도 정정하게 간판을 걸고 영업 중이라 길남 씨는 미소를 지어본다. 당연히 ○데 아이스크림 냉장고도 밖에 나와 있다. 

 

골목의 끝 아케이드 지붕이 끝나는 곳에 쌀집이 나타나는데 앉아 계시던 사장님이 갑자기 ‘워어이!’하고 단말마의 고함을 치신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비둘기 세 마리가 진열된 콩을 주워 먹으려다 푸다닥 날갯짓을 한다. 고얀 놈들이지만 평소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구포시장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줬던 구포장국밥 골목 풍경. 

▲구포시장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줬던 구포장국밥 골목 풍경.

 

부산, 그리고 묵묵히 일하는 구포시장


몇 가지 품목이 중복되는 골목을 더 돌아다닌 길남 씨는 숨을 크게 쉬어보고는 시장의 한 입구 앞에 다시 선다. 낙동강 건너에서 살펴보면 이쪽 범방산(백양산 줄기의 운수산)의 한 줄기가 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북이의 형상이라 이름 붙었다는 구포(龜浦).

 

그는 이곳 구포시장에서 다시 한 번 부산을 생각해 본다. 산과 강과 바다가 함께하며 왜란과 왜관, 일본인 거류지, 피란수도 등 이루 셀 수 없는 교류와 이동의 거점이었던 도시. 동남쪽의 바다에서 들어왔던 온갖 문물들과 사람들은 산을 건너 이곳 서쪽의 강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륙의 문물과 사람들 또한 이곳을 기점으로 부산으로 들어와 바다로 향해 나갔을 것 아닌가?

 

양산신도시에서 길을 잃었던 길남 씨는 무수한 변화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을 계속 해나가고 있는 구포시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하다. 400년의 시간 동안 주변의 도시를 연결하며 사람과 물자를 잇고 있는 구포시장은 말 그대로 전통과 현재가 함께 어우러진 통섭(統攝)의 공간이다. 

 

‘아아, 구포시자앙!’ 꼬르륵!

 

이제 출출한 것이 아니라 정말 배가 고프다. 길남 씨는 아까 지나쳐 온 먹자길을 떠올리고는 ‘클클클’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린다. 탐방과 취재의 맛은 이럴 때 가장 좋은 법이다. 

 

“자, 한 번 다시 들어가 볼까나?”

 

그는 다시 한 번 구포시장의 미로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작성자
배길남
작성일자
2018-06-2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7월호 통권 141호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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