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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연재

증산 왜성·부산진일신여학교·자성대 임진왜란 항전·항일운동 역사 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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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투어리즘’이란 전쟁·재난 등 비극적 역사와 그 흔적을 오늘에 되짚어보는 여행이다. 과거의 참상을 기억하고 경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반성과 교훈의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지역’, 미국의 ‘9·11 그라운드 제로’가 세계적 예다.  

 

부산의 경우 임진왜란의 최초 격전지이자 일제강점기 수탈의 전초기지였고, 6·25전쟁 때는 임시수도와 피란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특히 동구의 부산진역과 자성대에 이르는 지역은 ‘부산진성’이 있던 자리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침략에 맞서 민족교육과 여성개화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이번 ‘걸어서 만나는 부산역사’는 동구에 소재했던 임진왜란의 최초 격전지였던 부산진성을 중심으로 역사길을 걸어본다. 증산 왜성-부산포 개항가도-정공단-자성대-영가대-조선통신사역사관을 봄볕 속에 찬찬히 둘러본다. 

 

부산포 개항가도 독립운동 골목

▲부산포 개항가도 독립운동 골목. 

 

부산진성 허문 자리에 세운 증산 왜성 

 

초량산복도로 성북고개에서 버스를 내리면 조그마한 골목시장이 나오고, 그 길 따라 동구도서관 쪽으로 향하면 증산공원이 있다. 공원 입구 게이트볼장 쪽으로 묵직한 성벽이 보이는데, 이곳이 증산 왜성 자리다. 

 

‘증산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부산진성 북쪽 산등성이에 지어올린 성이다. 1592년 여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후 왜군의 해상 보급로가 끊기자, 왜의 우두머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해안 교두보에 물자비축과 방어를 위한 왜성 축조를 명한다. 이에 조선인을 징발해 해안을 중심으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부산에는 기장 죽성과 구포 등지에 왜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특히 증산 왜성은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린 부산진성을 허물어 버리고 그 위에 그들 방식의 성을 쌓아올렸기에 역사적 회한이 큰 곳이다. 왜성은 우리 성의 축성법과는 달리 지대석과 기단석이 없고 성벽이 하단부에서 상단부로 오를수록 날렵하게 곡선을 그린다. 우리 성이 성내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면, 왜성은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축조한 공격 중심의 성이다. 성벽을 돌아 공원의 제일 높은 마당에 선다. 본성의 천수각(天守閣)이 있던 자리다. 증산 정상을 깎아 만든 천수각은 왜성의 제일 중심인 본성의 지휘소이자 망루 역할을 하던 건물. 지금은 천수각을 받치고 있던 성벽, 천수대의 흔적만 남아있고 부산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천수대 자리에서 사위를 둘러본다. 앞으로는 부산 앞바다가 훤히 보이고 뒤로는 수정산, 엄광산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그 시절 부산포를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으리라. 왜성은 천수대를 중심으로 증산을 두르며 똬리를 틀듯 게이트볼장, 동구도서관, 좌천아파트 부근으로 성벽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증산의 정상을 깎아 만든 왜성 본성의 천수각이 있던 자리. 지금은 부산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증산의 정상을 깎아 만든 왜성 본성의 천수각이 있던 자리. 지금은 부산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역사문화테마거리, ‘부산포 개항가도’를 따라

 

증산 왜성에서 정공단으로 향하는 ‘부산포 개항가도’를 따라 길을 내린다. ‘부산포 개항가도’는 증산공원 일원에서 정공단에 이르는 골목길에 조성한 부산포 관련 역사문화테마거리다.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 3번 출구에서 부산포 개항가도 벽화골목-정공단-부산진교회-부산진일신여학교-안용복장군 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증산공원에 이르는 길이다. 

 

안용복장군 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이곳은 조선 시대 민간 외교관이었던 안용복 장군에 대한 일생과 그 활약상을 기록·전시해 놓은 곳이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땅’임을 일본정부에게 확약을 받은 사람이다. 

 

부산포 관련 역사를 기록해 놓은 담장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빨간 벽돌로 단아하게 지어올린 ‘부산진일신여학교’가 보인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으로 호주 선교회에 의해 1895년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이후 동래여자중·고등학교로 이어오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05년 지어진 건물은 현재 부산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옆에는 부산 교회사에서 주춧돌 역할을 했던 ‘부산진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진교회는 1891년 호주 선교회에 의해 설립됐는데, 교회 옆에 ‘일신여학교’를, 교회 아래에는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했다.

 

부산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었던 ‘부산진일신여학교’. 1905년 지어진 건물은 부산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부산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었던 ‘부산진일신여학교’. 1905년 지어진 건물은 부산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격전지, 부산진성

 

끄덕끄덕 개항가도를 계속 내려 오다보니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 남문자리였던 정공단(鄭公壇, 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0호)이 보인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鄭撥), 부관 이정헌, 애첩 애향, 충복 용월 등 의인들을 기리는 제단이다. 일제에 항거하다 폐쇄됐던 옛 부산진육영학숙 자리이기도 하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조선침략 선봉 제1군 1만8천700명은 700여 척의 배로 부산포를 침략해 왔다. 그들은 14일 우암 부근에 상륙해 곧바로 부산진성을 공격한다. 부산진성은 조선 시대에 경상도 해안에 설치됐던 수군 첨절제사의 4개 진영 중 제1의 해상관문으로, 왜군이 조선에 상륙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다. 때문에 왜군으로서는 조선침략을 위한 해안 교두보 확보를 위해서라도 필히 수중에 넣어야 할 곳이었다. 

 

당시 부산진성은 300여 호의 집과 실제 병력 1천명 정도로 왜군을 물리치기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을 중심으로 군·관·민이 똘똘 뭉쳐 의연하게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정발 장군은 평소에 검은 갑옷을 입었기에 ‘흑의장군’으로도 불렸는데, 그 용맹함과 인자함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였다. 이 부산진전투로 인해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적에게 맞서 장렬히 순절한 첫 장수가 됐다.

 

부산진성은 원래 내성과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본성으로 부산진성, 외성은 본성의 지성으로 부산진 지성으로 불렸다. 부산진성은 오늘날 정공단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을 둘러싸고 있었던 지역이었고, 부산진 지성은 현재 자성대가 있는 자리다.

 

자성대의 서쪽 문인 ‘금첩관’.

▲자성대의 서쪽 문인 ‘금첩관’. 

 

부산진성의 지성이었던 자성대 

 

자성대(子城臺)의 원 지명은 ‘부산진 지성(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 7호)’으로, 왜성의 모성(母城)에 딸려 있는 성이라고 자성대라 했다. 현재 남아있는 성터는 왜군이 부산포에 주둔하면서 원래 있던 부산진 지성을 헐고 그들의 방식으로 쌓은 왜성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부산진 지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4대 문을 축조해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했다. 당시 성의 둘레는 1천689척 높이 13척이었고 동서남북으로 ‘건동문’ ‘금첩관’ ‘종남문’ ‘구장루’라는 문을 두었다. 

 

성 안에는 공진관(객사)·검소루, 성 밖에는 진남정·목장창(진의 동쪽 10리)·대치창(진의 동쪽 45리) 등이 소재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도시계획의 미명 하에 인근 영가대와 함께 성이 철거되고 자성대 안의 일부 왜성의 흔적만 남게 됐다. 현재는 동문, 서문, 장대를 복원하고 동문을 ‘건축문’, 서문을 ‘금첩관’, 자성대 위의 장대는 ‘진남대’라 했다.

 

조선통신사역사관을 둘러보는 시민 모습.

▲조선통신사역사관을 둘러보는 시민 모습. 

 

선린우호의 장 ‘영가대’와 조선통신사역사관

 

영가대는 부산진성 서문 밖 서쪽 해안에 배가 접안할 수 있도록 선착장을 만들 때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를 겸해 세운 8칸 누각이다. 이후 역대 조선통신사의 출항지가 됐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 40년) 시작해 1811년(순조 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이곳 영가대에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출항하기 전 용왕에게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냈다. 조선 시대 통신사들의 항해관련 기록에 담긴 ‘해행총재’에 의하면 ‘해신제를 위한 제단의 높이는 4자, 사방 너비는 6자였으며 3층 계단 3개를 쌓아 흰 모래를 깔고 푸른 잔디를 입혔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부선 철도 부설공사로 인해 그 일부가 잘렸다가 부산진-삼랑진 간의 경부철도 복선공사를 하면서 철거돼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2003년 자성대 동쪽 담 모서리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누각형태로 영가대를 재현해 놓았다. 

 

‘조선통신사역사관’은 자성대공원 내 영가대 뒤편에 지상 2층의 규모로 지어졌다. 한·일간의 우호선린의 대명사인 조선통신사에 대한 정보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조성해 놓은 공간이다. 1층은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배경, 행로 및 통신사의 정의 및 역할, 한일 교류를 위한 현재의 노력까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2층은 관람객들이 조선 시대의 통신사가 돼 그 행로를 그대로 따라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을 떠나다’ ‘만남’ ‘여정’ 등의 주제로 통신사가 일본으로 가는 여정을 영상과 모형, 패널 등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본 내 조선문화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일본 내 조선의 문화(한류)’ 등으로 구성돼 있다.

 

부산진 역사길을 걷다보면 전쟁이 얼마나 부질없고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지 잘 알려준다. 이 길을 걸으며 다크투어리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나름 좋은 시간이 되겠다.

최원준 기사 입력 2018-04-02 부산이야기 4월호 통권 138호
자료출처 : 함께 나누고 싶은 '부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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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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