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12월호 통권 134호호 기획연재

‘체 게바라’의 나라 낭만적인 음악 정열적인 춤 ‘중남미의 보석’

내용

콜롬비아 아마존을 갔을 때였다. 콜롬비아와 브라질의 국경마을 레티시아에서 원주민 가이드를 따라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꼬박 하루가 걸려 아마존 오지마을 베르완노에 도착했다. 짙은 밀림에 둘러싸여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만큼이나 사람들도 좋은 인디오 마을. 낡은 판잣집 벽면에 붙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내 눈길을 끌었다. ‘체 게바라’.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문명을 접하기도 어려운 이곳에도 중남미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나라, 낭만적인 음악이 있고 정열적인 춤이 있는 나라, 세계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국민들이 행복한 나라, 바로 중남미의 보석 ‘쿠바’다. 쿠바 섬은 ‘서인도제도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동경의 섬이다. 이 나라가 공산화되기 이전인 1940년대만 해도 미국과 유럽 상류사회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휴양지였다. 

 

쿠바 여행의 출발지 수도 ‘아바나’

비행기에서 내리자 내리쬐는 햇볕에 숨이 턱 막힌다. 찜질방에 들어온 듯 열기가 이글대지만 그늘로 들어오면 금세 땀이 마른다. 더운 열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은 무표정이지만 눈망울만은 더할 나위 없이 맑다. 시내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바라본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자유로움이 넘친다. 말레콘 방파제를 따라 담소를 나누는 젊은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한 시야에 들어온다. 드문드문 젊은 여성들이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짓을 한다. 정류장도 아니고 택시가 다니는 것도 아니다. 쿠바 여성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하는데, 여성들을 태워주는 것이 일반화돼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탄다는 것이 두려운 일인데 쿠바에서는 흔한 일이라니 놀랍다. 쿠바 여행은 수도 아바나에서 시작한다. 아바나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멋이 가득한 쿠바의 택시들이 번쩍인다. 아바나의 첫 번째 관광명소는 센트로 아바나에 있는 건물 ‘까삐똘리오’다. 아바나의 랜드마크인 까삐똘리오는 쿠바 혁명 이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지금은 쿠바 국립과학원으로 사용 중이다. 인기명소답게 까삐똘리오 앞은 여행객들을 위한 다양한 탈 것들이 대기하고 있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 쿠바의 수도 아바나 혁명광장의 내무부 건물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 쿠바의 수도 아바나 혁명광장의 내무부 건물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조각상 즐비한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

쿠바의 명소로 알려져 있는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로 향했다. 세계 4대 공동묘지의 하나인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는 66만1천157㎡(20만평) 넓이에 200만개가 넘는 묘가 들어서 있어 차를 타고도 한참을 달려야 다 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이 공동묘지는 단순히 크기 때문에 4대 공동묘지의 하나가 된 것이 아니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상들이 묘지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바 사람들은 이곳을 공동묘지가 아닌, 거대한 조각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쿠바 정부는 이 꼴롱 묘지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입장료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장례문화도 다르고 묘지 모습도 다르기에 공동묘지라기보다는 커다란 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젊은 부부가 꽃다발을 들고 가기에 물어보니 남편 아버지의 기일이란다. 쿠바에서는 가족묘를 쓰기에 가족들의 무덤을 같이 만든다. 한 개의 무덤에 대여섯명의 유골함이 있는 것이다. 부부를 따라 무덤에 도착하니 이미 남편의 삼촌이 와서 무덤을 손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무덤은 자연적으로 부스러지기도 하는데 부부는 달마다 와서 무덤을 보고 간다고 한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세계 4대 묘지로 불리는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세계 4대 묘지로 불리는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쿠바 길거리에서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들어간 기념품을 파는 노점을 쉽게 볼 수 있다.

▲쿠바 길거리에서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들어간 기념품을 파는 노점을 쉽게 볼 수 있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쿠바’

꼴롱 묘지의 조각들은 화려하기만한 것이 아니라 조각마다 다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소방관이 오기 전 불을 끄다 죽은 31명의 용감한 주민들의 모습도 있고, 가슴 아픈 모자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묘지의 가운데에 쿠바의 초대 대통령 세스페데스의 묘지가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 대통령 묘비보다 훨씬 높고 더 화려한 묘지가 있다. 이 묘지 주인공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1950년대 초는 헤밍웨이의 전성시대였다. ‘노인과 바다’로 1953년 퓰리처상을 받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툭하면 플로리다에서 쿠바 별장으로 갔다. 쿠바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이 아바나에 있는데 ‘플로리디따’라는 바였다. 헤밍웨이는 바의 구석자리에 자주 앉아서, 자신이 낚았던 고기 자랑을 하며 칵테일을 마시곤 했다. 바에서 일하던 흑인 바텐더가 헤밍웨이를 위해 칵테일을 개발했는데 그 이름이 ‘다이키리(Daiquiris)’다. 곱게 간 얼음에 럼과 사탕수수즙, 레몬을 넣고 만든 이 칵테일을 맛본 헤밍웨이는 그 때부터 ‘다이키리’만 마셨다. 헤밍웨이의 칵테일 ‘다이키리’가 소문이 나자 돈 많은 미국 관광객 사이에서는 ‘쿠바의 플로리디따 바에서 다이키리 한 잔을 마셔보지 못했다면 쿠바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생겼고, 이 바에는 미국인 부호들이 줄을 섰다. 사람들은 모두 흑인 바텐더가 직접 만든 다이키리를 마시려 했고, 바 주인보다 가난한 흑인 바텐더가 더 많은 돈을 벌게 됐다. 다이키리 한 잔 값은 50센트였지만 팁으로 열 배, 스무 배의 돈을 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흑인 바텐더가 플로리디따 바를 사고 그 옆의 식당까지 구입했다. 꼴롱 공동묘지의 대통령 묘 옆에 있는 크고 화려한 묘의 주인이 바로 이 흑인 바텐더의 묘이다.

 

헤밍웨이 흔적 고스란히 남아 있어

쿠바에 가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플로리디따는 분홍빛 단층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외벽의 간판에는 헤밍웨이가 좋아했던 곳, 다이키리의 원조라는 글이 붙어 있다. 바는 중앙에 카운터가 있고, ‘ㄷ’자 모양의 공간에 몇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다. 집기들은 헤밍웨이가 살던 당시의 것 그대로라 한다. 한쪽 구석에는 바에 앉아있는 헤밍웨이의 동상이 있고, 안쪽의 두 벽면에는 헤밍웨이 관련 사진 수십 장이 전시돼 있다. 시간이 늦었던지라 손님은 많지 않았고, 밴드의 재즈 공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던 다이키리 한 잔을 마시면서 쿠바를 사랑했던 미국의 대문호가 된 것처럼 분위기에 취해 본다. 연주하던 노래가 끝이 나자 재즈 밴드의 공연이 끝났는지 악기를 주섬주섬 정리를 하기에 염치 불구하고 ‘라쿠카라차’를 청했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검은 머리 동양인의 ‘라쿠카라차! 플리즈~’ 단 두 마디에 다시 악기를 꺼내어 연주를 시작한다. 헤밍웨이가 쿠바를 사랑했던 것은 쿠바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다이키리가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고 흥이 넘치는 쿠바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쿠바는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쿠바 곳곳에는 헤밍웨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쿠바는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쿠바 곳곳에는 헤밍웨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바에 남겨져 있는 ‘헤밍웨이’의 글귀). 

 

음악·춤으로 활기 넘치는 쿠바의 밤 

쿠바를 얘기할 때 헤밍웨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쿠바 곳곳은 헤밍웨이의 흔적으로 넘친다. 아바나 동쪽으로 가면 작은 어촌, 꼬히마르가 있다. 작고 조용했던 해변 꼬히마르는 유명세를 타면서 커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지만 원래는 헤밍웨이가 낚시를 즐겼던 곳이다.

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고요’다. 청록을 뽐내고 있는 나무길이 있는 마을을 지나면 때 묻지 않은 자연 빛깔 그대로의 바다가 눈에 찬다. 헤밍웨이는 이곳에 서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도 했는데, 이 꼬히마르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며,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기에 헤밍웨이에게 수많은 영감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헤밍웨이는 1930년대부터 쿠바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60년까지 쿠바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 때 묵었던 호텔이나 식당이 잘 보존돼 있고, 살던 집은 박물관으로 만들어졌다. 박물관에는 사슴, 표범가죽, 호랑이 얼굴 등이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낚시와 함께 사냥도 무척 즐겼다고 한다. 또 대문호답게 식사하는 식당만 빼고 모든 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다. 3층으로 올라가면 언제나 유유자적 놀기 좋아했던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전망 좋은 방도 있다. 미국의 작가가 지금은 대표적인 반미국가인 쿠바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어 있으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바나의 밤 거리는 노래를 하며 춤을 추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바나의 밤 거리는 노래를 하며 춤을 추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바나로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진다. 아바나의 하늘에 노을이 지고 낭만적인 밤이 찾아오면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다. 밤이 되자 카페는 더욱 활기가 넘친다. 거리도 춤을 추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열정적인 아바나의 밤이다. 

가게뿐 아니라 거리 어디를 가나 신나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아바나의 밤이 깊어질수록 아바나는 점점 춤과 함께 뜨거워진다. 아바나엔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카페가 많다. 플라멩고부터 클래식 연주까지 취향대로 골라서 갈 수 있다. 쿠바의 낮과 밤을 겪어 보면 헤밍웨이가 사랑한 나라 쿠바, 춤과 음악의 뜨거운 열정이 끓는 나라 쿠바를 왜 카리브해의 진주라 부르는지 제대로 알 수 있다.

작성자
도용복
작성일자
2017-12-0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12월호 통권 134호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