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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795호 기획연재

오래된 골목에서 이야기를 건지다

부산, 걷다 보다 반하다 - 이바구길과 브라운 핸즈

내용

길은 철길에서 시작해 산으로 이어진다. 부산의 관문 부산역에서 부산으로 오는 길과 부산을 떠나는 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는 알 수 없다. 세상 모든 길의 운명이 그러한 것처럼 이 길도 시작과 끝이 서로 마주보고 있고,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다. 초량 이바구길이다. 
 

이바구길은 세상의 모든 길과는 같으면서 사뭇 다른 저만의 독특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길은, 산으로 뻗어가기 때문이다. 이바구길의 숙명은 이 길이 탄생된 근원에서 기인한다.
 

부산역 건너편에 있는 옛 백제병원 언저리에서 시작하는 이바구길은 오래된 낯선 길이다. 이 길의 시작은 전쟁이다. 임시수도 부산 시절, 가난한 피란민들이 산자락에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시작된 동네와 길이 시작됐다. 

 

이바구길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야경. 발아래 보이는 불빛 하나하나에 이곳에 숨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바구길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야경. 발아래 보이는 불빛 하나하나에 이곳에 숨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바구길은 요즘 핫하다는 부산의 산복도로의 한자락이자, 햇수로 60년 이상된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터지고 확전되면서 국토의 남쪽 부산에는 피란민과 전쟁고아, 전쟁 미망인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맨몸 하나로 낯선 타관에 휩쓸려온 가난한 이들은 잘 데도 얻어먹을 데도 없는 곤궁의 시간을 견뎌야 했으리란 건 불문가지. 거지와 전쟁고아와 과부들이 밥 한 술을 구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였던 지옥도가 당시 부산이었을 거다. 미군이 참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미군이 흘리고 간 레이션 박스가 항구 밖으로 몰래 흘러나왔다. 집 없는 이들은 레이션 박스 몇 장을 들고 산 밑으로 들어갔다. 길이 끊긴 곳, 산 아래에 돌을 치우고, 풀을 뽑고, 흙을 다듬어서 터를 닦고, 레이션 박스와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비바람을 막을 한 뼘 움막을 지었을 거다. 며칠 굶어 텅 빈 뱃속은 동네 우물에서 길어온 물 몇 바가지로 채웠을지도 모른다. 얼기설기 엮어 꼴만 갖춘 집이었지만 사방이 가려진 방 안에 몸을 눕힌 첫날, 가난한 움막 주위에는 불빛 하나 없었을 것이다. 쪽창으로 멀리 미군의 군수물자가 부려지는 부산항의 불빛을 졸린 듯 보며 노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힘든 피란살이의 신산함마저 잠시 그이의 어깨에서 내려와 까무룩 졸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았고, 전쟁이 부숴버린 집들은 산자락으로 파편처럼 쏟아졌다. 자고 일어나면 이웃이 생기고, 자고 일어나면 골목이 생겼다. 가난한 판잣집은 위로 위로 올라가서 마침내 산꼭대기에 닿았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길은 그곳에서 끝이 났고, 사람들은 좁은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삶을 이어갔다.
 

이바구길은 전쟁과 가난이 만든 슬픈 역사의 길이다. 백제병원에서 시작해 산꼭대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켜켜이 쌓여있는 길이다. 이바구길이 가난이라는 더께를 털어내고 부산의 역사와 정서를 품고 있는 부산 정서의 원형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바구길을 걷는 시간은 길의 초입에 있는 초량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학교 담벼락에 동구 출신이거나 이곳과 인연이 있는 유명인들의 간단한 약력과 사진 패널을 부착해놓았다. 고 이주일,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같은 대중문화예술인과 고 장기려 박사, 청마 유치환과 김민부 시인 등이 그들. 이 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산을 향해 오르면 가파른 계단이 앞을 막는다. 유명한 168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지 않고서는 마지막에 닿을 수 없다. 계단은 계단으로 그치지 않고, 중간 중간 갈래를 뻗어 새로운 골목을 만든다. 골목의 끝에서 막 이곳에 둥지를 튼 젊은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산의 허리를 숭덩 베어낸 작은 공간에 카페를 차리고, 공방을 열었다. 이들은 커피를 내리고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만들어 이곳을 찾은 이들과 만난다. 갓 가게를 낸 젊은이들의 웃음에서 가난의 더께는 찾을 수 없다. 길이 시작이었고 끝이었듯이 젊은 청년들이 오래되고 낡은 골목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고 있는 중이다.

 

168계단을 찾은 관광객들.
▲168계단을 찾은 관광객들.
 

168계단. 모노레일이 설치돼 편하게 오를 수 있다.
▲168계단. 모노레일이 설치돼 편하게 오를 수 있다.
 

168계단은 지금은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 그러나 골목의 속살과 실핏줄까지 훑어보고 싶다면, 모노레일을 버리고 두 발로 걸어서 천천히 오르는 것이 좋다. 골목의 갈래가 펼쳐내는 산복도로의 풍경과 멀리 바라보이는 부산항, 골목의 자락 자락에 숨어있는 김민부 전망대와 유치환의 우체통같은 보석같은 공간을 만날 수 있다. 168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부산을 내려다볼 수 있는 카페가 있다. 영진어묵 카페다. 이곳에서는 부산역과 북항대교가 한눈에 보인다. 길 건너편에는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대신 입간판만 세워두고 핸드 드립 커피를 내려 파는 카페 구름도 있다. 집주인이 직접 발로 뛰어 구입한 품질 좋은 원두로 내려주는 커피는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카페 귀퉁이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앤틱 옷을 판다. 

 

1922년 건립된 옛 백제병원을 리모델링한 브라운핸즈 초량. 젊은 카페 순례자들 사이에서 부산에서 가장 가볼 만한 인기 카페로 유명하다.
▲1922년 건립된 옛 백제병원을 리모델링한 브라운핸즈 초량. 젊은 카페 순례자들 사이에서 부산에서 가장 가볼 만한 인기 카페로 유명하다.
 

커피향을 밟고 오른 이바구길, 이곳에서 한 나절을 보내며 부산의 속살을 더듬어보는 가을은 꽤 근사할 것 같다.

 

■ 볼거리

동구인물사 담장과 김민부 전망대, 유치환의 우체통 등 동구와 인연이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6·25막걸리와 추억의 양은 도시락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 168 도·시·락·국, 달고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문방구 등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가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 가는 방법

도시철도 1호선 부산역 하차. 부산역 건너편 화장품 가게에서 좌회전을 하면 옛 백제병원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가 나온다. 이바구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작성자
글·김영주 / 사진·권성훈
작성일자
2017-09-2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795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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