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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남동생을 살린 부산여행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 장려상

내용

대전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동생 경식이는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했다. 부도가 나 사업을 접어야 했다. 결국 가진 것 중 돈이 되는 것은 싹싹 긁어 빚잔치로 끝을 냈다. 그리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풀이 죽어있는 그런 동생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누나인 나. 난 내 자신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말단공무원, 나는 전업주부. 큰돈을 만지던 동생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처남을 저대로 그냥 놔두면 안 되겠어요. 혹시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하면….”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끝이 서고 손발이 떨렸다.

“당신이 데리고 며칠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마음을 추스르도록 도와주구려.”

남편의 충고로 우리 남매는 목적지도 없이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기차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부산에 발을 디뎠다. 어쩌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곳이 바로 부산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 생선회 좋아하지?”

내 말에 동생은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우리 남매는 서산의 작은 갯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생선회는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다고 이름 있는 생선을 모양내어 썬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잡어를 숭숭 썰어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산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자갈치시장의 횟집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회 한 접시와 소주를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맛있지?”

마땅히 할 말도 별로 없었다. 장문의 대화보다는 단문으로만 묻고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열심히들 살고 있구나.”

동생의 말을 듣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고무 앞치마를 두른 사람들이 생선을 다듬어 이리저리 배달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손수레에 생선상자를 싣고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기웃거리는 관광객에 자신의 가게에 들르라며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었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생선에 연신 물을 끼얹는 사람도 있었다. 동생도 나도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도 한 때는 저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동생은 소주 한 잔을 꼴깍 마시고는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 나는 이참에 동생에게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고 싶어 술 한 병을 더 시키며 시간을 끌었다.

“누나는 술도 별로 못하면서….”

“나는 저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꼭 옛날 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경식이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꿈같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자갈치 시장을 나오면서 상인들의 소리와 행동을 한 가득 몸에 품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 이를 다시 한 번 끌어내 보기 위해서였다.

“경식아, 우리 저 영도다리 걸어서 건너볼까?”

우리 남매는 술이 얼근한 채 영도다리 난간에 서서 지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 그 노래 있잖아.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응,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우리 둘은 난간 위에 손을 얹고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흥얼거렸다. 아마 동생도 노래 가사처럼 어려웠던 한국전쟁 당시를 생각하는 듯 했다. 비록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어려움을 동생은 자신과 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고향을 버리고 낯 모르는 타향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겠니?”

“그래도 열심히 일해서 지금은 다들 잘 살고 있잖아.”

동생은 열심히 일했다는 말에 힘을 주며 지나는 배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당시 고향을 버리고 막막하고 불쌍했던 사람들을 품어준 부산이라는 도시에 감사했다. 물밀 듯 밀려드는 피난민을 수용해 자리를 잡게 해 준 도시가 바로 부산인 것이다. 그런 억척스런 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제 2의 도시로 성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종대 모자상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가슴속까지 후련했다. 우울하고 심란했던 동생도 두 팔을 벌려 불어오는 해풍을 가슴으로 안고 있었다. 우리는 물끄러미 모자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해 전 우리 남매만 남겨놓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없는 집에 시집와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아버지 곁에서 고생만 하시다가…. 어머니의 일생을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났지만 억지로 참았다. 동생도 나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우리 남매는 모자상의 표지석을 읽고 있었다.

“이승에서 거꾸로 매달아놔도 저승보다는 낫다더라. 죽긴 왜 죽어. 자살할 용기를 사는데 쓰지.”

표지 석에 자살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동생이 들으라는 듯 크게 혼자 지껄였다. 동생은 내 소리를 들었건만 동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래층 휴게소에서 시원한 음료수로 갈증을 달랬다. 동생은 여전히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동생, 생각나나? 엄마가 시렁 위의 찬 꽁보리밥에 칠게 쭉쭉 찢어 넣고, 열무와 섞어 썩썩 비벼주던 때를…. 그 때는 비빔밥이 왜 그리 맛이 있던지….”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던 동생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아마, 엄마의 손맛이었었나 봐. 지금은 그런 맛이 안 나니.”

동생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정말 자살바위 위에 세운 모자상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우리는 동백섬의 누리마루로 들어가는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자동차로 북적이는 대도시 속에 이처럼 한가하고 조용한 은신처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주변의 경관과 조화롭게 꾸며진 산책로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과 같았다. 바다와 길과 숲과 웅장한 광안대교가 하나로 어우러져 심신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었다. APEC정상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방에 들어가니 소박하면서도 한국적 멋스러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누나, 일생에 한번쯤은 저 자리에 앉아봐야 하는데….”

APEC정상들이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너스레를 떠는 동생은 부산에 오기 전 침울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동생에 팔짱을 끼고 해운대 백사장에서 한여름 동안 북적였을 피서객을 그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나는 갈매기는 날갯짓도 하지 않은 채 불어오는 해풍에 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동생, 저 갈매기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날 듯, 동생도 세상이 구르는 대로 그럭저럭 살게나. 아등바등 살려고 몸부림친다고 이삼백 년 살겠나?”

내 말에 동생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누나 말이 맞긴 한데, 남자가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동안 풀이 죽어 한숨만 쉬던 모습과는 달리 동생은 어느새 오기가 생긴 듯 대꾸하는 말에 힘이 들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해변 끝의 유람선 선착장에 서 있었다.

“누나 우리 배 한 번 타볼까?”

지금까지 내가 끌어야 마지못해 따라오던 모습과는 달리 동생이 먼저 유람선을 타자고 했다. 그리고 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오징어 안주도 사서 배에 올랐다. 해운대에서 광안대교를 거쳐 오륙도를 돌아오는 코스였다. 우리는 선상에 서서 아까와는 반대로 해운대와 누리마루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백사장을 걸을 때만 해도 그리 길게만 느껴지던 백사장이 반대로 바다에서 바라보니 한 뼘도 안 되는 듯 보였다. 세상이란 묘하다. 언제나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할 뿐 반대 방향에서는 보려 하지 않는다. 지금의 동생 마음도 그럴 것이다.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만 보고 판단할 뿐 반대쪽에서 자신을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남편은 그것을 동생에게 느끼게 해 주라고 내게 여행을 제의했을 것이다. 뱃전에 기대 맞는 초가을 바람에 한기가 느껴졌다. 동생은 소주병을 따더니 병 채 한 모금을 마셨다. 예전에 열심히 일할 때 파워 넘치던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배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누나, 나도 유행가 가사처럼 다시 돌아올 날이 있으려나?”

“그럼, 네 나이 아직도 창창한데….”

나는 이때다 싶어 힘주어 말하며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봐라. 조금 전 누리마루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과 반대로 바다에서 누리마루를 바라보는 느낌이 다르잖니?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거꾸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

“지금은 네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위에서 거꾸로 보면 너 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아. 그런 어려운 사람들이 다 실망하고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다면 이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니?

“…….”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내려온 피난민이 그냥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저런 누리마루가 어찌 생길 수 있었으며 각 나라 정상들이 이 부산에 모일 수 있었겠니?”

“…….”

“저 광안대교를 봐라. 옛날 같으면 감히 바다에 교각을 세우고 어찌 다리를 놓을 생각을 했겠니? 이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꿋꿋하게 연구하여 재도전한 역군들의 힘이 아니겠니? 그러니 동생도 여기서 포기하면 영원한 실패자가 될 뿐이야.”

동생은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우리는 광안대교의 야경이 볼만하다는 부산 사람들의 권고로 광안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콩나물 해장국으로 종일토록 술에 지친 속을 풀었다.

“야! 멋있다,”

한마디로 불의 축제였다. 부산의 고층빌딩에서 퍼져 나오는 빛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쭉 뻗은 다리의 불빛이 조화를 이루니 환상 그 자체였다. 가히 부산을 대표할만한 명소였다. 한편으로는 저 불빛이 동생에게는 희망의 불빛이 되어주길 마음으로 빌었다.

부산의 아침은 더 일찍 밝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무척 상쾌했다. 우리는 달맞이 고개라는 명성에 맞지 않게 거꾸로 해맞이를 하고 있었다. 살며시 두 손을 잡은 채 아무 말도 없이 떠오르는 태양에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분명 그 소원은 같은 것 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묵언은 범어사 대웅전에까지 이어졌다.

‘제발, 제 동생 경식이가 새 마음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부처님께 합장하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 내외와 동생 내외는 부산을 향해 차를 몰았다. 몇 년 전 우리 남매만 부산을 여행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동생에게 재기의 힘을 준 부산이 그리워 부부동반으로 출발했다. 나는 어느새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형님, 여행을 가니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경식이 아내의 물음에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동생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니 좋을 수밖에 더 있나?”

“이 사람, 참 이상하네. 마님 댁이 땅을 샀는데 왜 머슴이 좋아하고 난리야.”

남편의 말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나는 부산이 왠지 좋다. 푸른 바다가 있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우리 엄마들이 자갈치 시장에서 삶의 물음표를 던져준다. 또 세계 속에 우뚝 선 누리마루가 있으며 바다를 꿰뚫는 광안대교는 건설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도시 속의 해변으로 우리나라의 대표 해수욕장이 아니던가! 그래도 부산이 더 좋은 건 내 동생이 재기할 수 있는 꿈을 주었다는 것이 더 좋다.

작성자
김화순
작성일자
2013-11-2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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