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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 아버지의 바다

내용

아버지의 고향은 부산이다. 아버지는 약주를 하시고 얼굴이 적당히 붉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당신의 고향, 부산 이야기를 하신다. 아버지는 일곱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당시 부산에서 양말 공장을 운영하셨던 할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공장과 집을 모두 팔아야 했고, 아버지의 일곱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친척 집에 맡겨졌다. 도망치듯 상경한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아버지는 일곱 형제의 가장이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불과 열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과 소년의 동생 영희는 고모 댁에 맡겨졌다. 모두가 배고팠던 1960년대, 두 소년을 받아준 고모 댁의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한참 자랄 나이에 두 소년의 배를 채워준 것은 밀가루였다.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먹기도 어려워지자 소년은 밀가루를 묽게 탄 풀죽으로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고모 댁의 사정이 더 나아질 것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져 두 형제는 닭 모이를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년은 자신이 닭 모이를 먹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어린 동생까지 닭 모이를 먹어야 하는 가난을 견딜 수 없었다. 소년은 장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양말꾸러미를 풀어 그것을 가져다 시장에서 팔았다. 소년은 양말을 판 돈으로 밀가루를 샀고, 수제비를 맛있게 먹는 동생을 보면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자 아버지가 남기고 간 양말마저 다 동나버렸다. 그러자 소년은 방학을 틈타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했다. 해가 뜨거운 낮이면 수영구 모래사장으로 나아가 바캉스를 즐기는 연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팔았고, 해가 질 무렵이면 극장가 주위를 배회하며 '아이스깨끼'를 외쳤다. 극장가를 배회하다 보니 소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영화에 쏠렸다. 영화를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소년은 극장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는 중년 신사나 아주머니 옆에 아들처럼 서 있다가 기도의 시선을 피해 쏙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초량극장과 대도극장, 철도문화회관 등을 누비며 소년은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보안관', '두남매', '지옥문', '오인의 해병', '뚱뚱이와 홀쭉이', '오발탄', '마부', '로맨스 파파' 등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며 소년은 잠시나마 가난을 잊고 낭만에 젖어 꿈을 키워나갔다. 소년은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멋진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스깨끼 통을 메고 극장가로 나온 소년은 깡패 무리에게 붙들려 죽도록 얻어맞았다. 이리저리 쥐새끼처럼 깡패들을 피해 다니며 장사를 해왔지만 결국 그들에게 붙들려 다시는 극장가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이스깨끼 통도 뺏기고 극장가에서 쫓겨난 소년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동생에게 더는 수제비를 먹일 수 없게 되자, 소년은 동생 영희를 데리고 수영구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는 무한한 생명력을 품고 가난한 소년을 위로했다. 소년은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 줄기나 조개, 불가사리 따위를 주워 모았다. 그리고 나뭇가지에다 불을 피워 바다가 보내준 그것들을 구워먹었다. 바다는 끊임없이 두 가난한 형제에게 먹을 것을 보내주었지만, 그것이 소년들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일대에 큰 태풍이 몰려왔다. 소년은 바다에 나갈 수 없었고 그나마 양식도 얻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면서, 두 형제는 수제비라도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되뇌었다. 그들의 소원을 들었던 것인지, 부산의 푸른 바다는 가난한 두 형제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주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날이 개자마자 미역 줄기라도 얻기 위해 바닷가로 나간 소년은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몇 번이고 눈을 비벼 떴다.

"저거 다마내기가?"

소년이 동생 영희에게 물었다. 그들 눈앞에 펼쳐진 바다에 양파가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양파의 행렬에 이어 오이, 호박, 가지 따위의 채소들까지 둥둥 떠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소년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양파를 건져 바닷가에 옮기고, 또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 오이, 호박, 가지 따위를 건져냈다. 모래사장에 잔뜩 쌓인 채소들을 보면서, 이 정도면 일주일 치 식량은 되겠다고 뿌듯해하는 찰나, 소년의 눈에 너무 멀리까지 헤엄쳐 가는 영희의 모습이 들어왔다. 파도에 밀려 가까이 다가오던 양파가 알게 모르게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모른 채 그대로 쫓고 있었던 것이다.

"영희야!!!"

동생은 허우적대며 파도에 휩쓸렸고, 소년은 파도와 싸우며 미친 듯이 헤엄쳐갔다. 겁을 잔뜩 먹고 허우적대는 동생의 목덜미를 낚아챈 소년은 구사일생으로 모래사장에 닿아 사지를 뻗고 누웠다.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바다에 대한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두 소년은 먹을 것을 잔뜩 보내준 바다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고 소리쳤다. 바다에서 건진 채소들을 자루 한가득 담아 고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모 식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날은 두 형제의 잔칫날이었다. 고모는 밀가루를 사다가 형제에게 양파와 호박을 썰어 넣은 수제비를 끓여주고, 고소한 호박 나물과 새콤한 오이 무침을 만들어주었다. 소년과 동생은 소원대로 배불리 수제비를 먹었다. 단 하루였을 뿐, 이후에도 두 형제는 가난에 굶주려야 했지만 바다가 선물해준 그날 하루의 행복한 기억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영화감독이 되진 못했지만, 여전히 영화를 좋아했고, 조개, 오징어, 새우 따위의 바다 내음 나는 음식들을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수제비를 찾으셨고, 뜨거운 수제비와 덩달아 술잔을 기울이고 나면 어김없이 부산에 살던 소년 시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줄 형제는 아무도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난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며 언젠가 같이 살날을 꿈꿔왔던 형제들은, 이제는 얼마 되지도 않는 할아버지의 재산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다. 형제들 가운데 아버지가 가장 가슴 아파한 동생은 소년기를 함께한 영희 작은아버지였다. 영희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뒤 모든 형제와 연락을 끊고 잠적하더니 십 년 째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실 때마다 영희 작은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 바다로 둥둥 떠내려오는 채소들을 파도 무서운 줄 모르고 건져 올리던 그날의 이야기를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들려주셨다. 어디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동생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아버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내일 당장 부산에 가자는 말씀을 꼭 하셨다. 가서 아버지가 헤엄쳤던 바다 구경도 하고, 장사하던 시장 구경, 극장 구경도 하고 조개구이도 먹자고. 그렇게 이미 고향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마음은 다음 날 해가 뜨고 나면 도루묵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왔다.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버지의 고향 부산은 그렇게 현실과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런 아버지를 위로하듯, 아버지에게 부산보다 더 큰 선물이 찾아왔다. 영희 작은아버지와 재회한 것이다.

추석 날 할아버지의 성묘를 갔던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의 산소 앞에 엎드려 눈물 흘리던 동생과 재회하셨다. 십 년을 잠적했던 동생을 나무라는 것도 잊은 채, 아버지는 동생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날 밤새도록 작은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던 아버지는 어김없이 부산 이야기를 하셨다.

"영희야 우리 내일 해 뜨면 부산 가자. 부산에 꼭 가자"라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부산에 가보지 못하셨다. 어쩌면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그토록 그리워하는 부산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가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고향 땅을 보며 외로워질까 봐, 첫사랑을 첫사랑으로 간직하듯 부산을 그저 그리운 고향으로 품고 있는지도.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꼭 한번 부산에 가보고 싶다. 아버지가 양말을 팔던 시장과 아버지의 꿈과 낭만을 키워준 초량극장,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마음껏 헤엄치던 부산의 푸르고 드넓은 바다를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훗날 나의 아이들과 함께 보고 싶다.

작성자
우수진(서울시 쌍문동)
작성일자
2012-10-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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