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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부산예술문화계의 거목 최상윤 선생

예술부산 ‘예인탐방’ 27. 최상윤 선생

내용

부산예총의 수장으로 지역의 예술문화계를 이끌어 온 최상윤 회장의 임기가 지난 2월 끝났다. 2000년부터 연거푸 3연임이니 12년 동안 부산예총을 이끌어온 셈이다. 회장임기가 끝날 때쯤이면 느슨해지기 마련인데 최 회장은 차기 회장 선거가 있는 예총의 정기총회 전날도 밤늦게까지 출판사에서 『부산예총 50년사』를 최종 점검했다. 자신의 임기 내에 하기로 약속했던 일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에서 선생의 성정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다. 진실한 마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난다. 또 행동으로 나타나야 비로소 그 '마음의 훌륭함'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파동을 일으킨다. 지난 12년간 부산예술문화계에서 선생은 몸소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실천의 운동가였다. 그래서였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지역 예술문화의 텃밭을 갈아 고루 씨를 뿌리고 가꾼 결과 예술문화의 불모지라 불렸던 부산이 지금은 21세기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부산은 지금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제1의 르네상스가 6.25 사변 때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부산에 내려와서 작업을 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다 떠난 후 부산은 오랫동안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달고 있었지요. 그런데 2000년 즈음해서 부산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비엔날레 등의 국제행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요. 그 뒤로 연극, 무용, 음악제 등이 계속 생기기 시작해 전 장르에 걸쳐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국제대회가 안 생긴 게 없습니다.”

선생이 열거한 10년 동안 생긴 부산의 국제행사에 선생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총회장으로서 부산시장이 당연직인 조직위원장을 대신해 조직위원장의 업무를 전담하다시피하며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협찬금을 얻으러 다닐 때는 뒷머리가 따끔거릴 때도 있었지만 실리가 아니라 명분을 생각하니 당당할 수 있었다.

동아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는 월급을 받았기에, 2006년 정년퇴직 후에는 연금이 나왔기에 30개도 넘는 행사의 일들을 무보수로 맡았지만 무조건 열심히 했다. 그렇게 모든 장르에 걸친 국제행사의 산파역을 했지만 문학만 국제행사를 만들지 못했다. 선생은 본인의 전공인 문학의 국제대회를 만들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침묵'은 없는 것과 같다.

선생은 원래 철학을 하고 싶었다.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시절, 철학을 전공하기에는 너무 가난한 청년이었다. 당시 철학이란 먹고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철학과 관련된 학과를 찾았다. 문학의 주제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철학과 맞닿아 있었기에 문학을 전공하게 되면 생활인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타협점을 찾았다. 철학을 '실존주의 문학'에 연결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문학을 택하게 된 것이다.

문학을 택한 후 인간의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의 문제에 귀착하니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소외된 인간들의 한을 표현하고 그런 한의 고리를 끊는 방법에 대해 몰두한 선생의 문학은 자연스레 저항문학을 지향하게 됐다. 당시의 사회는 양심을 지키면 성공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사회였기에 사회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겨울나무」, 사학의 비리를 고발한 「부활」 등을 발표했다. 중앙 중심의 문단을 비판하며 새로운 시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지역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규정, 강인수, 김용태, 이해웅, 정영자, 김중하 등 지역의 문인들과 함께 『남부문학』이라는 계간지도 만들었다. 그 외에도 학보사 지면에, 강의시간에 늘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때문에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는 반정부세력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한 달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했다. 글을 쓰지 말라는 건 선생에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건 곧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그래도 그 시간이 몇 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될 때까지 이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울한 80년대가 지나고 민주화가 되어 다시 소설을 쓰려 했지만 근 10년간 논문만 쓰다 보니 문체가 달라져 있었다. 논문 문체를 문학으로 이으려니 평론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론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마음속 고향은 소설이기에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있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을 환원하는 삶

스승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스승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박지홍 선생에게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갖춰야 할 예의를, 허웅 선생에게서는 학문하는 방법을 배웠다. 김무조 선생에게서는 제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제자의 취직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강용권 선생을 보며 선생 자신도 그러겠다고 다짐했다.

학부 때부터 석사과정까지 수업을 받았던 요산 김정한 선생에게서는 불의에 대한 정신, 따라지 인생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배웠다. 나중에 요산 선생은 자신의 강의를 제자인 선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학원 수업만 했다. 최상윤 선생은 요산 선생의 수제자였다.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우리말본과 국어정본 강의를 들은 최상윤 선생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우리말을 마음 놓고 사용 못하게 한 일제시대에는 목숨을 걸고 우리말을 지켰는데 지금은 우리말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사라져간다고 안타까워한다.

지난 10여 년간 부산 이곳저곳에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이 또한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우리말의 중요성을 역설한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지난 2005년 APEC 정상회담을 위해 지은 '누리마루'의 이름을 선정할 때도 글로벌 시대에 맞게 영어로 짓자는 다수에 맞서 싸웠다.

“이스라엘은 천년을 쫓겨 다녀도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라를 찾을 수 있었지요. 만주는 말이 없어져서 국가를 찾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말이란 그 나라의 혼입니다. 만약 APEC하우스라고 이름 붙이면 우리말은 하나도 없는데 어느 나라 건물이냐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선생의 호소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선생이 제안한 세계 정상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뜻이 담긴 누리마루와 APEC하우스를 더해 '누리마루 APEC하우스'라고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지금 모든 사람들은 그곳을 누리마루라고 부른다.  

부산예술문화의 텃밭을 다지다

예순이 다 되어갈 무렵, 선생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때 마침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할 기회가 되어 98년부터 문인협회 회장직을 맡게 됐다. 문인협회 회장으로 영호남 문학 교류의 물꼬를 트고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여덟 권으로 된 문학선집을 발간했다. 이 문학선집에는 시, 시조, 소설, 아동문학, 수필, 희곡, 평론, 번역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부산문인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한 푼의 예산도 없이 시작하여 여덟 권의 문학선집으로 빛을 본 것은 개인의 힘이 아니라 부산문인들의 열의와 정성임을 강조했다.

문학은 선생의 전공이기에 문단에 기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총회장직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선생에게 하루는 예총의 단위협회 회장들이 찾아와 예총회장 출마를 권유했다. 문협회장 임기가 끝나면 교환교수로 가야 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예총회장은 돈이 있어야 선거를 치를 수 있는 줄 알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고사固辭했다. 그런 중에 선생보다 연배가 높은 단위협회 회장들이 따로따로 찾아와 권유하는데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30분 마감시간을 남겨두고 등록했다. 그렇게 21대 부산예총 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왕 맡았으니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부산무대예술제를 새로운 문화예술 양식이 요구되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종합예술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해 예총 산하 10개 단위협회가 모두 참여하는 '부산예술제'로 확대 전환했다.

2002년 부산예술제부터는 5,500여 정회원 가운데 업적이 뚜렷한 예술인을 대상으로 '부산예술상'을 신설하여 시상했다. 매년 시상금 천여만 원을 마련키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 또한 예총의 수장으로서 당연한 발품이라 생각했다. 부산예술상은 이후 부산젊은예술가상까지 폭을 넓혔다.

서울 중심의 '문화권력'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해 2000년부터 6대광역시 예총의 힘을 결집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 한국예총 6대광역시연합회 창립총회를 2001년 열고 이듬해(2002년)부터는 6대광역시 예술교류전을 열었다. 6대광역시 예술교류전은 전국광역시·제주특별자치도 예술교류로 이어져 지역 문화인들 간의 문화적 연대감 조성을 통한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고 예술교류 및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지역별로 한 장르씩 안배해 해마다 열리고 있다.  

4년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또 선거철이 다가오니 주위의 분위기가 선생을 한 번 더 예총회장을 시키려는 쪽으로 흘러갔다. 부산시에서는 시대로 축제조직위를 이끌며 4년 동안 시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선생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예총에서는 부산예총의 새로운 발전을 위해 선생이 필요했다. 양쪽에서는 강력하게 권유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고 하여 할 수 없이 한 번 더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2번째 임기를 맞이했다.

2번째 임기 때는 계간으로 발간되던 부산예총의 기관지인 『예술부산』을 격월간으로(2004년) 발전시키고 문화의 불모지라 불리는 부산을 예술문화가 푸르게 자라는 텃밭으로 만들어 나가자는 취지로 [예술을 사랑하는 부산시민 모임]을 결성(2004년 12월)하여 예술 속에 시민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시민교양강좌나 예술아카데미 등을 개설하여 시민들이 예술 감상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밖으로는 부산시와 함께 지역의 예술문화 터전을 넓히고 안으로는 예총의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다하며 8년을 보내고 나니 주위에서 또 한 번만 더 부산예총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죽어도 못나가겠다 했지만, 선생의 공약이었던 부산예총회관의 건립을 책임지고 설립한 후 그만 두라는 여론에 밀려 3번째 임기를 맡았다.

3번째 임기에서는 선생이 회장직을 맡은 후 부산 유일의 종합예술제로 자리매김한 '부산예술제'를 2009년부터 자매도시와 함께하는 국제교류 예술제로,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부산국제도시예술제'로 발전시켰다. 선생은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러시아, 대만 등지로 이제 막 국제교류 예술제의 길을 열어가는 부산예술제가 본격적인 '국제교류예술제'로 넓혀지길 바란다.  

그리고 2011년 3월 3일 부산예술인들의 50년 숙원이었던 예술회관의 개관식을 맞았다.

2011년 부산예술회관 개관 후, 선생은 경성대 부경대 동명대 부산외대 부산예술대를 잇는 주변지역을 서울의 대학로처럼 부산의 젊음이 넘치는 문화거리로 만들기 위해 '5월, 젊음의 축제'를 열었다. 그에 더해 '원로예술단'을 창단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장 원숙한 지경에 오른 원로예술인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에 대한 예우에 관한 대책이 예술계에서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지역 예술의 터전을 다지고 예총의 미래를 열어온 선생이 부산예총 회장으로서 한 마지막 작업은 『부산예총 50년사』발간이다. 그동안 미처 발굴하지 못했던 지역 예술의 과거를 발견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열어가는 이 작업 속에 선생의 12년간의 세월이 그대로 녹아 있다.

'부산예술회관'이 부산예총의 5,500여 예술인들의 몸을 담을 수 있는 집이라면 『부산예총 50년사』는 부산예총의 정신의 집을 닦은 것이다. 선생이 닦아온 반석 같은 집에서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부산예총의 앞날을 기대하며 '음지에서는 독버섯을, 햇볕이 나면 꽃을 피우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라는 선생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문학의 꽃, 예술의 꽃이 여기저기 만발한 봄날을 기다려본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2년 3월호
작성일자
2012-10-3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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