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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201902호 문화관광

하층민부터 양반까지, 장터에서 향교까지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의 현장

동래만세거리·구포만세거리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현재를 만나다

내용
31운동만세거리

 

부산 3·1운동 100년 현장을 가다 〉〉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온 나라가 뜨겁다. '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함성이 되살아나고,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장소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의 열기가 전파되자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인호, 엄진영, 김귀룡 등이 대규모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 동래장터 만세시위는 부산지역 만세운동의 봉홧불이 됐다.


3월 중순에는 구포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구포 지역 유지와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돼 구포 장날인 3월 29일 구포장터와 구포역 일원에서 일제에 항거해 조국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을 폈다. 3·1 운동이 학생들이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구포장터 만세운동은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돼 그 의미가 특별하다.
동래장터 만세운동과 구포장터 만세운동은 부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만세운동이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동래와 구포에는 만세거리를 만들어 이를 기념하고 있다. 두 곳의 만세거리는 부산지역 항일운동의 태동지이자 정신이기도 하다.

일제에 항거했던 저항정신과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퇴적되어 유전자 속에 각인된다. 동래에서, 구포에서 일어난 들불같은 함성은 부마민주화운동으로, 2016 ~ 2017년 촛불정신으로 이어졌으리라.


부산 만세운동 불 지핀 동래만세운동
동래장터 만세운동은 부산의 만세운동을 더 거세게 타오르게 한 도화선이 됐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보 학생이 중심이 돼 동래시장 앞에서 동래향교까지 1㎞ 남짓한 장터거리에서 만세운동을 폈다. 함성은 뜨거웠고, 탄압과 핍박은 거세고 매서웠다. 이 운동으로 김인호 엄진영 등 24명이 검거되고, 배후로 지목된 곽상훈 역시 서울에서 체포됐다. 이들은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최고 1년 6개월에서 4개월의 형량을 언도받았다. 고문과 옥중 생활의 후유증으로 김성조 선생은 병사했고, 다수의 학생들은 출옥 후에도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동래만세거리

 

그날의 함성 머금은 기념비
구포만세거리는 구포시장 입구에서 구포역까지 약 1㎞ 구간이다. 10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이곳에는 뜨거웠던 그날의 함성을 만날 수 있다.
도시철도 3호선 구포역 인근 낙동강제방에는 '구포장터 3·1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구포장터 3·1만세운동'은 경성의전에 다니던 양봉근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지역청년들이 3월 29일 정오, 장날을 맞아 모인 상인·농민·노동자 등 1천200여 명과 함께 구포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항일의거이다. 이 만세운동으로 김옥겸 선생 등 지역의 의인 43명이 옥고를 치렀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이들 4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구포장터 3·1만세운동 기념비'에서 조금 더 가면 구포역 광장과 구포역(경부선)이 나온다. 구포역은 낙동강 하류의 물류를 모아 서울로 실어 보내는 역으로 1903년 개설됐다. 1930년대 일제에 의해 낙동강제방과 구포다리가 개설되고 구포장이 번창하면서 주요한 교통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구포만세거리에는 구포장터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구포역사 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구포역 철길 벽면에는 항일운동 관련 벽화들이 길을 따라 이어지고, 구포장터 3·1만세운동의 정보도 자세하게 기록한 패널을 전시하고 있다. 일본군 주재소도 재현해 놓고 군데군데 포토 존도 설치해 놓았다. 구포만세거리에는 북구근대역사관도 있다.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한 물류요충지였던 구포의 역사와 인물들, 구포만세운동 등 구포의 근대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에서 구포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선각자들을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

구포만세거리

 

'구포장'에서 타오른 함성
이곳에서 구포시장으로 연결되는 굴다리 벽면에는 '구포장터 3·1만세운동 기념비' 사진과 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43명의 의인 명패를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북구의 도시 변천사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고, 굴다리를 오르는 곳에는 구포시장과 지역의 명소를 소개하는 액자를 걸어뒀다.
구포만세운동은 구포장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예전에는 시장이 광장의 역할을 했던 탓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구포장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항일운동 근거지 주민 자부심 대단
3·1 만세운동에 대한 구포 사람들의 자긍심은 특별하다. 3대째 구포에서 살고 있는 장세진 씨(70)는 만세거리에서 조그만 가게를 한다. 태어나기 전에 벌어졌던 역사적인 사건을 그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으면서 자랐다.
"어릴 때 할배한테 구포장날 만세운동에 대해 엄청 들었지요. 장에서 소쿠리 팔던 사람, 소 몰고 나온 사람까지 다 만세를 불렀다고 합디다. 온 장터가 난리였고, 일본 순사들이 총을 쏘는데도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더라고 하데요. 여(구포만세거리)가 그런데요. 우리나라를 지킨 곳 아잉교."
이곳에서는 해마다 구포 3·1만세운동 기념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3월 30일이다. 실제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날에 가장 가까운 토요일에 행사를 열고, 구포만세거리에서 피어오른 민족 자주의 함성을 되살리게 된다.
부산에서 가장 크게 전개됐던 동래만세운동과 구포만세운동은 모두 시장 근처에서 일어났다. 당시 동래시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구포시장이 외부와 연결되는 큰 시장이었다면 동래시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동래만세거리는 예전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길 양 옆으로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기념탑이나 기념 조형물을 세우는 것도 여의치 않다. 수안파출소 앞에 만세거리를 기리는 간단한 조형물이 서있을 뿐이다.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지 못한 책임은 후대에 있다. 기록으로만 남은 역사의 현장에서 3·1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알리는 펼침막을 보며 부끄러움이 앞선다.

일본주재소


만세거리 근처에 있는 박차정 의사 생가를 만나면 부끄러움은 더 커진다. 박차정 의사의 생가는 동래고교 담장 맞은편 골목 안쪽에 있다. 박차정 의사는 무장 항일 투쟁에 나섰던 동래 출신 독립운동가다. 1938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39년 중국 장시성 쿤룬산 전투에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박차정 의사 생가는 현재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래만세거리와 구포만세거리는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흔적은 희미해졌다. 거리를 메웠던 함성은 사라졌고, 사람도, 거리도, 풍경도 변했다.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있다. 기억과 혼이다. 일제에 항거했던 부산사람들의 자주독립 정신과 저항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퇴적되어 유전자 속에 각인됐다. 동래와 구포를 넘어 부산 전역에서 일어난 들불같은 함성은 부마민주화운동으로, 2016~2017년 촛불집회로 이어졌으리라. 동래만세거리와 구포만세거리는 지나간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글·김영주  사진·권성훈


 

작성자
김영주
작성일자
2019-02-2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201902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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